[오피니언] 걷기와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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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명(시카고신학대 교수)

 

2017년은 <월든>의 저자 헨리 소로우가 태어난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올 초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가지 작심을 했었다. 소로우가 남긴 미국 정신사의 소중한 글들을 선별해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읽고, 그를 본받아 의도적인 걷기를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글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걷기를 통해 자연과 공감하고 사색을 한다는 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는 걷기도 실천하지 못한 채 한 해가 지나갔다. 하지만 걷기에 대한 그의 생각만은 잘 간직하고 있다.

걷는 행위는 언제나 철학의 동반자였다. 많은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깊이 있는 생각을 위해 걸었고, 걸음을 자기반성의 수행과정으로 삼았다. 철학은 걸으면서 하는 것으로 판단한 고대의 학파도 있었다. 기독교에서도 한때 성지를 향해 묵묵히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을 신앙생활의 절정으로 간주했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걷기의 철학을 실천하고 이를 정신의 유산으로 남긴 사람이 바로 헨리 소로우였다. 사후에 출판된 에세이 <워킹>은 그의 사상의 실천적인 원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소로우는 하루도 자연 속을 걷지 않으면 몸에 녹이 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올바른 걷기는 몸의 운동을 위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문명의 때를 벗고 자유를 찾는 행위였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자연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나를 찾아나서는 행위였다. 그는 기술적인 문명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의 정신이 통제받고 있다고 보았고,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자연과 공감하면서 걷는 행위를 제시하고 또 스스로 실천했다. 소로우는 미국의 의미도 여기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사명은 유럽의 문명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문명의 오류를 자연을 통해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시와 문학과 철학이 아직 문명에 구속되지 않는 미국의 자연과의 공감 속에서 태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자연을 걷는 행위는 미국의 정신적 미래를 다지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걷는 방향도 서쪽을 선호했다. 유럽으로 향하는 동쪽은 과거였고 문명의 그늘이 드리워진 공간이었다. 반면에 서쪽은 문명이 닫지 않은 미국의 자연과 미래 그리고 약속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소로우에게 올바른 걷기는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성지는 예루살렘과 같은 거창한 도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살던 콩코드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자연 그 자체였다. 자연의 순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걸을 때의 심정은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심정으로 해야 했다. 그에게 문명이 만든 길을 벗어나 자연의 불확실한 길을 찾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저항이었다. 소로우가 주장한 걷기의 저항은 걷는 행위가 파업과 데모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현대 미국의 자본주의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소로우는 자연의 길을 막고 산림을 훼손하고 자신의 땅이라고 펜스를 쳐놓은 땅주인들을 싫어했다. 그에게 자연의 땅은 돈 내고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걷는 것에 대한 소로우의 생각은 극단적인 면이 있다. 그 자신도 자연에서 걷는 행위를 순례의 행위로 인식하는 사람을 한 두 사람밖에는 만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에 말을 따르자면 요즘 걷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대게 잘못된 걷기를 하고 있는 게 된다. 자연을 즐기기 위한 걷기나 건강을 위한 걷기는 모두 소로우가 설정한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걷기의 기준을 만족키지 못한다. 하지만 그 출발은 어쨌든 걷는 행위다. 자연을 즐기면서도 충분히 감탄과 경외심과 일치감을 느낄 수 있고, 몸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이 분리될 수 없다. 소로우를 현대적으로 이해하자면, 걸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경지가 있고 깨우칠 수 있는 사색의 깊이가 있다는 것으로 파악된다. 새해에는 소로우를 생각하면서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