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아름다운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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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우리가 어린 시절에 불렀던 노래 중엔 이런게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여기서 말하는 청포란 녹두로 만든 ‘묵’ 을 말 함이다. 묵은 도토리묵, 메밀묵, 녹두묵, 제물묵 네가지가 묵이 대표적인 것이다. 녹두묵을 청포묵이라고도 하지만, 왕의 수라상에 오르게 되면 탕평채라 하였다. 제물묵은 녹두에 치자(梔子)로 색을 입혀서 노란 묵이 된것을 말 함이다. 녹두하면 전봉준 장군의 별명인 녹두장군을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이 노래에 나오는 파랑새는 사실은 팔왕(八王)새가 바뀐 것으로 ‘팔왕’을 합치면 全이 되기에 파랑새가 전봉준을 상징하는 새라고도 했다. 전봉준 장군은 키가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을 갖게 된것이다.

우리가 아는 파랑새 중에는 1908년 벨기에의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쓴 희곡이 있다. 남매가 꿈속에서 요정과 함께 추억의 나라와 미래의 나라에서 파랑새를 찾으러 갔지만 실패를 했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집에 있는 새장에 있었다는 이야기 이다. 이 희곡의 주제는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다는 상징적인 몽상극(夢想劇)이다.

많은 인간들이 자기의 삶을 관조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을 상 싶은 행복을 찾으려 한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현실을 탈피하고 싶어 하고, 현실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가르켜서, 심리학자들은 파랑새 증후군이라 한다. 이 증후군이 꼭 젊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헛된 희망에 사로 잡히는 노년의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에 동조하기를 바란다. 특히나 노년이 되면 자기 의견만 알지 타인의 의견은 모른다. 사실은  모르는게 아니라 들으려 하지를 않는다. 듣지않기에 모르는 것이다. 사회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듣고 말하기가 기본적인 대화의 윤리인데 이걸 무시하며 사는 것이다. 노년이 되면 희망사항만 있지, 자기의 희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경우도 있다.

“희망이란 백일몽에 불과하다.”라고 정의를 내린 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은 굶어 죽고 말 것이다”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한 사람도 있다.  이런 비평을 한 사람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이들의 표현의 의도는 희망은 회의적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꿈을 갖는다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보는 것이다.

꿈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뚜렷하다. 꿈은 목적이 있기에 가야한다. 희망은 가져도 되고, 안가져도 된다. 꿈은 확실한 도착지가 있다. 허나 희망은 꼭 도달 해야 할 목적지가 없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을 해 보면 노년엔 꿈보다 희망이 더 자유스러운 거다.

노년이 되면 몸의 이구석 저구석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을 한다. 그 소리가 점점 아픔으로 다가오면 모든게 짜증스러워지는 것은 당연 할 것이다. 이 때는 아름다운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노년에 갖게 되는 희망은 약이다. 모든 아픔을 이겨 낼 만한 힘이 희망 속에 있다. 고령사회는 디스토피아(Dystopia)가 아님을 이해해야 하며, 자신만의 유토피아(Utopia)를 가지고 있어야 더욱 행복한 노후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