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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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봉완 사학 박사

워싱톤 정신대 대책위원회 이사/고문

시카고 소녀상 건립 대책 위원회 회원

 

 

최근에 시카고 한인사회에서, 위안부 소녀/평화 동상 건립건에 대한 화제가 활발하다. 수년전에 시작한 일이 결말을 보지 못하고 진전이 없다. 미국의 제3 대도시로서, 12개 이상의 동상/기념비가 이미 서있는데 시카고 에는 없다. 이곳의 거주하는 한인으로서 심기가 좋지않다. 여기에 필자의 동기가 있다. 필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오해가 있고, 그에 대한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있는 데 이유가 있다고 간주하여, 이글을 통하여, 오해를 풀고, 지식/상식을 넓히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다.  25년간 이 문제에 관여해왔고, 위안부 할머니들 나이에 가까운 연로한 여인,  또,  한국 역사학자로서,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위안부란 아세아의 제2차 대전쟁 혹은 태평양전쟁(1932-1945) 중의 성노예를 미화, 왜곡하여 부르는 말이다. 200,000명의 젊은 여인과 여자애들이 일본지배하에 있었던 10여국에서, 유린/납치당하여, 먼곳의 전투지에 압송당하여, 하루에 수십번 일본군을 위한 성행을 강제로 베풀어야 했다. 현재,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큰 국제적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2015년 12월 28일에 맺어진 한일 합의와, 작년 초에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건립된 위안부 “소녀/평화”상 때문에 국교가 1월 초 부터 4월 초까지 3개월간 완전히 결렬까지 됐었다.

더구나, 금년은, 김학순(1925-1997) 전 위안부 할머니가 50년 가까이 지키던 침묵을 1991년 8월14일에 깨고 발표한지 27년이 되는 해다. 또, 재미 위안부 운동이 워싱톤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가 1992년 12월 16일에 창설 된지 25년이 넘어 작년말에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루었다. 필자는 이 운동의 초창기부터 참여해 왔다. 1996년 9월 30일에, 죠지타운대학에서 주미 최초의 학술대회를 공동 주최했고, 최초의 학문 서적, 제2차 세계대전의 위안부의 유산 <Legacies of Comfort Women of WWII>을 공저/ 편집하여 2001년에 출판했다.

그외에도, 수십 차례의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 운동은 일본정부에게, 여러가지를 요구해왔는데, 일본 은, 특히 아베 신조 수상의 극우 정권은, 제일 근본인, 위안부 시설부터 부인하며, 법적 책임을 회피한다. 미국 여러 곳의 기념비나 동상건립도 막대한 자금($500,000이상)을 써가면서 방해하고 있다. 시카고 소녀상 건립이 지체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인들은 끈기가 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작정으로 옳은 일을 해 나간다. 그리하여,  미전역 12개 장소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디트로이트만 빼놓고는 양해안, 특히 동해안의 장소다. 시카고가 위치해 해있는 중서부가 그만큼 후진적인가, 뜻이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한 지식/상식이 부족한가? 필자는 답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쉬운 답이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작년만 해도, 동해안 두곳에서 건립을 성취했다: 뉴욕 맨하탄, 죠지아주 아틀란타 교외의 부륵 해이븐. 또, 최근의 큰 성사로는 샌프란시스코의 4인 동상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동상은 처음으로, 3개국, 중국, 필립핀, 한국, 소녀상 을 높이 세웠고, 김학순 할머니의 동상이 좀 거리 가 있는 낮은 곳에서, 어린애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극적이며, 획기적인 동상이고, 도시 경계내 의 공공지에 건립되어, 국제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극히 분노하여 샌프란시스코와 오사까시와 미국간의 자매 도시 관계를 단절하였는데, 그 시의 중국계 시장, 에드윈 리는 버티었다. 이 시장은 최근에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시카고 지역은 서정일 31대 한인회장의 지도하에서 소녀상 건립 작업이 시작하였다.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 분과 위원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루시 백 박사가 임명되어, 그분의 근기있는 노력으로 $50,000 이상의 모금이 되고, 한국에서 소녀상을 구입하여, 시카고까지 가지고 왔으나, 환영하는 곳이 없어, 어느 창고에 뭍힌지 2년이 넘었다. 회장 임기가 끝난 후에 31대 회장단은 ‘희망 31’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위안부 동상일도 토론하고 친교도 한다. 현 서이탁 시키고 한인회장과 이근무 이사장은 31대 회장단과 협력 하여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추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소녀상 건립은 공공지에 하면 이상적이지만, 시카고 서버브에서는 일본의 경제 보이콧을 두려워 거절한다. 그러나, 한인의 개인이나 단체 소유지에는 가능하며, 어느 지방 정부에서 거절할수 없다. 그러나, 한인단체 중에는 자기 단체 소유지에 소녀상 세우는 것을 꺼리고 있다. 왜냐? 의외로 반대하는 분 중에는 연장자 여성들이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너무 나이가 가까워 심리학적 과대 동인화(identify)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듣기로는, 다음의 4가지 이유가 있다 한다. 1)위안부 문제는 창피하고 더러운 일이다. 2)너무 정치적이다. 3)위안부 소녀 동상이 세워 지면, 한인 소유지에 파괴/손상을 유린한다. 4)재 시카고 일본인과 일본 경제단체에서 견제당할 우려가 있다.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해보기로 한다.

1)위안부 문제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잔악한 가해자인 일본이 창피해야 할일이지, 희생자이며 피해자인 한인이 창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더러운 일이 아니다. 이 여인들이 자신의 선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직업 창부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12살짜리가 직업 창부가 될 수 있었을까? 비인간적인 행위를 파렴치하게 범하고도, 뻔뻔하게 부정하는 가해자가 창피해야할 것이다.

2)위안부 문제는 너무 정치적이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역사이며, 역사는 문화다. 너무 정치적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피한다면, 한인 역사는 언급할 제목이 전무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는 정치적이 아닌 것이 없다. 한인의 긴 역사와 삶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장소에 위치해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는 파란곡절이 많다. 3대 강국(중국, 러시아, 일본)에 포위돼 있어 거의 1000번의 침략을 당한 나라다. 이런 뼈 아프게 슬픈 일을 기록한 것이 우리의 역사이며 문화이고, 우리민족의 삶이니 어찌 위안부 문제를 제거하여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민속 노래 “아리랑”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부터 불러지기 시작했다 한다. 그 노래는 완전이 구두로 몇 세대를 전해져 이제는 우리의 상징이며, 민족의 혼을 불러내는 애절한 노래다. 시세가 급하여, 역사를 기록하기 힘들 때, 구두 전설이 일어난 일을 전하는 것이 보통이다.(oral history) 그런 다음에 구두 선언을 기록하여 공실명의 역사가 된다. 그렇게 이루어진 역사가 곧 문화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하소연이 결국 역사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아픈 문화에 포함된다. 한인 위안부 역사가 이렇게 우리 역사와 문화에 포함돼가고 있다.

  1. 위안부 소녀 동상이 세워지면, 파괴/손상을 유린한다: 힘들게 모금하고, 알뜰살뜰이 세워 놓은 한인사회 소유지에 해가 될까 우려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현재 건립된 12개 동상/기념비 장소에 한군데도 파괴당한 일이 없다고 관계자들이 말한다. 그중에 아홉이 공공지에 있으며, 셋은 한인 소유지에 세워져 있다. 한인 소유지에서는 한인들이 일상으로 돌보고 있고 소속 시의 담당 경찰이 순찰한다.
  2. 일본인 사업과 단체에서 견제 받는다: 사실은 일본인 인구는 한인 보다 적어 그들이 우리를 다둘린 다하여 우리가 피해받을 일은 별로 없다고 본다. 일본인들이 한인사회의 덕을 보면 보았지 우리가 그들의 헤택을 못 받을까봐 걱정할 일은 없다고 본다.

 

<위안부 역사와 사실>

-어원: 어원은 일본어, “이안후,” 즉, “위로와 안위을 베푸는 부인” 에서 나온 말이다. 대다수는 부인이 아니라, 12살부터 30살 미만 나이의 미성년 여아들이나 젊은 여자였다. 이들은 태평양 전쟁중 일본군이 식민지화했거나 점령했던 10여개 나라에서 유린, 납치당하고 먼 전투지에 군대 수요품처럼 압송되어 일본 군대가 본 정부 허락하에 설립된 “위안소” 에 연금되어 하루에도 30-40회 일본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젊은 여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인수: 처음의 추측으로는 20만명이었다. 현재 그 수는 40만명으로 늘어났다. 중국 본토가 개방이 되었고, 최근에 출판된 책 때문이다. 바싸(Vassar) 대학의 주 페이페이(Peipei Qiu) 교수가 쓴 중국의 위안부(The Chinese Comfort Women)가 그 책이다. 중국의 광대한 대륙을 1937년후에 일본 군대가 점령했다. 점령지에서는 위안부 소집이 더욱 잔인하여 식민지인 조선 이나 대만 보다 강제 납치가 더 많았다. 이중 80%가 한인여성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고, 일종의 인종차별로 한인여성들을 제일 좋아 하였기때문이었다 한다. 한인여성의 인물이 좋고, 안색이 희며 한인의 결혼전 정조를 고수하는 관습때문에 처녀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소집된 어린 여아와 젊은 여인들은 위안소에 연금되어, 도망치거나 회피하려했다가는 심한 고문을 당하여 살인까지 당했고, 임신하면 강제 유산을 당하였다.

-생활: 이렇게 연금된 여인들은 노예같은 생활을 쉴 새 없이 하였으니, 아침에는 요리, 청소, 빨래, 오후부터는 병정들을 곡간같은 단간에서 받고, 저녁에는 상관 장교급의 군인들의 강요에 응해야 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이 가까워질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했다. 처음에는 전후에 환금할 수 있다는 표 딱지를 받았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그 가치는 폭락하고 말기에는 그나마도 분배하지 않았다.

-전후: 전쟁이 끝났을 때, 이 여인들은 소식도 못듣고 버림받았거나, 멸살당했거나, 귀국중 선상에서 바다에 투신당했다. 그리하여 극소수의 생존자가 귀국하였지만, 사회적 모욕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온갓 막일을 하며 생사의 기로에서 죽은 듯 숨어 살았다. 냉전이 끝난 후 국제관계의 호전과, 한국내에서 민중 민주주의 발기로 1991년에 처음으로 김학순 할머니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장려와 지지를 받아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선언하였다. 이후에 댐이 터지고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숨어살던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나서니, 처음에 대한민국 정부에 둥록한 수가 238명이었다. 그중 36명만이 현재 생존해 있다.

-증거: 이에 대한 증거는 많이 파괴되었지만 남은 문서가 있었다. 일본 주오대학의 요시미 요시아끼 교수는 국가 방위국에서 위안부에 관계된 문서를 발견하여 위안소 조직은 일본정부의 명령하에 위로는 천황으로부터 현지 사령관까지 직선 명령하에 조직되었다는 것을 명실공히  증명하였고, 이에 대하여 획기적인 책, Jugun Ianfu(종군 위안부, 1995; Comfort Women, 2000)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