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함석헌과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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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명(시카고신학대 교수)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의 제일 중요한 지식인이자 사상가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 군사독재 시대까지 모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해 싸운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였다. 1930년대 한국의 역사를 고난사로 해석해 <성서조선>에 연재한 그의 글은 역사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남겼고, 해방 후엔 발전시킨 그의 씨알사상은 한국적인 사상의 기초를 모색했고, 도교 사상과 퀘이커 사상을 아우르는 그의 평화주의 철학은 아직도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다. 그가 남긴 30권의 <저작집>은 20세기 한국의 정신문화적 유산이라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함석헌을 새삼 떠올리는 이유는 한국에서 함석헌을 배제하고 종교개혁의 정신과 의미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서구역사의 분기점이었다. 신학과 철학과 예술을 포함한 서구의 모든 학문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17세기 자연과학의 발전도 종교개혁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루터 자신이 원했던 건 교회의 개혁이었다. 중세 교회의 화려한 제도와 신학 그리고 예술과 예식이 인간의 구원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대신 인간이 오직 믿음만으로 신 앞에 바로설 수 있고, 이를 위해 오직 성경만이 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신의 은혜를 매개하는 목사가 따로 있지 않았고, 믿는 이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신의 부르심과 은혜를 체험한다고 믿었다. 이런 루터의 사상은 당시 교회의 입장에선 교권에 대한 저항이고 그릇된 믿음을 가르치는 이단이었다. 이런 개신교의 저항정신은 루터 이후 수많은 교단과 종파들이 생겨나면서 교권과 교회주의에 파묻혀 사라지기도 했고 때로는 교단의 신학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절반의 성공이라 규정하고, 교회주의가 아니라 무교회주의를 통해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1861-1930)였다. 무교회주의 운동은 무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그는 믿음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믿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였고, 믿음이 있는 곳이 그에겐 교회였다.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기존 교회는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없었다. 우치무라는 평신도와 구분된 사제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성경과 믿음이 중심된 영적인 교회를 믿었기에 교리와 성례전도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했다.

함석헌은 일본 유학시절 우치무라를 만났다. 귀국 후 함석헌은 한국 개신교의 교권주의와 교회주의에 저항해 무교회주의 운동을 펼쳤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끝없이 물었고, 그 뜻에합당한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고, 한국에 기독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물었다.  기존 교회는 함석헌을 이단으로 취급했고, 그는 그 칭호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의 사상이 무르익으면서 함석헌의 종교개혁론은 무교회주의를 넘어 생명의 원리에 의거한 종교의 개혁과 거듭남을 주장했다. 그는 신적인 영원함이 시대에 따라 새로운 말씀으로 나타나야 생명력을 지닌다고 믿었기에 종교의 개혁을 원했고, 새로운 말씀을 찾았고, 이를 통한 영원함을 갈구했다.

변화가 생명의 본질이라 믿었던 함석헌은 세상과 교감하며 자신의 사상을 성숙시켰다. 시카고도 그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1962년 첫 미국 방문 때는 시카고 한 한인교회에 들려 어머니주일 설교도 하고, 시카고 여러 곳의 인상을 글로 남겼다. 아직도 이 지역엔 그를 기억하는 오산학교 제자와 친척도 살고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 그의 글을 함께 읽는 독서모임도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10월 31일이 되면 나는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미완의 종교개혁을 생각하고 이 시대 교회의 미래를 걱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