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난하나 가난하게 행동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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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시카고 기쁨의 교회 담임목사

 

구약성경에 보면, “룻”이라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은 분명히 남성중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기독교 경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 보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가부장적인 색깔이 가득한 그림 속에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포인트’가 되는 특별한 색깔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하나 바로 룻기라는 성경 말씀이다.

모압 사람인 룻은 이스라엘의 기준으로는 이방인이다. 엘리멜렉이라는 유대인이 이스라엘의 극심한 기근으로 모압땅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두 아들이 이방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의 며느리라 룻이었다. 하지만 그 가정에 큰 우환이 생겨, 룻의 시아버지인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두 모압 땅에서 죽게 된다. 이에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깊은 상심에 빠지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두 며느리에게 각자의 사는 곳으로 떠나라고 말한다. 첫째 며느리는 가지만, 둘째 며느리인 룻은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고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룻 1:16)라고 말하면서, 나오미를 좇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함께 돌아온다.

그런데 지금보다도 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었던 세상에서 두 과부와 두 여자가 살아간다는 것은 구걸하며 사는 것 외에는 살 수 없을 만큼의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나오미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다. 유일하게 집안에서 먹고 사는 것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룻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룻은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대로, 추수를 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부러 떨어뜨려 놓는 이삭을 줍기 위해 주변의 밭으로 간다.

그러던 중, 룻은 시아버지인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이삭을 줍는다. 그 모습을 본 보아스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룻을 유심히 지켜 본다. 그리고 그의 하인에게 룻에 대해서 묻는다. 그 때 그 하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

아무리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도 한 사람의 한 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곡식을 줍는 것인데, 룻은 “아침부터 와서 하루 종일 줍고, 잠시 쉬웠다가 저녁 늦게까지 이삭을 줍는 중”이라는 것이다.

룻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시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과부이고, 이방사람이며, 여자이고,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 그러나 룻은 그런 소문과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이 정도로 가난했다면, 차라리 빌어 먹는 자가 되던지, 몸을 팔던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무책임한 세상의 말에 룻은 흔들리지 않는다. 가난하지만 가난하게 행동하거나 처신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 땀 흘리는 인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 그 자유로 하나님 형상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인간!

룻은 가난하지만 가난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룻의 이야기는 인간의 본질 회복에 대한 중요한 종교적 메시지를 주고 있다. 가난(물질적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는 인간의 삶(무형과 영적인 가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룻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는 인간의 정체성을 가졌으나, 역으로 그는 보아스가 자신을 선택하도록 만들게 하고(룻 3장), 끝내 다윗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룻 4장)

우리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때로는 영적이든 가난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가난하게 행동하지 말라.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한 끼를 채울 이삭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넘어 우리가 개척할 내일의 진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