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유효한 부르심

87

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유효한 부르심은 다른 말로 소명이라고도 하는데, 구원의 서정에서 예정 다음에 위치한다. 구원의 서정에 대해 정리하자면, 첫째,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 시간 밖에서, 즉 영원한 현재에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모든 것, 특히 구원할 자와 유기된 자를 예정했다. 둘째, 소명 또는 유효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를 부르신다. 단순한 부르심이라고 하지 않고 유효한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면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중생이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부패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살아나게 한다. 넷째, 회심이다. 중생한 자는 반드시 회심하게 되어 있다.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회심하기 때문에 중생한다고 주장하지만, 개혁주의는 중생하기 때문에 회심한다고 말한다. 회심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의 행위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다.

 

다섯째, 칭의이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법정적 정의이다. 인간은 예수님이 재림하고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기까지는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다. 그런데도, 미래에 확실히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의롭지 않더라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칭의에 대한 이런 정의는 어디까지나 신학적 정의라는 것이다. 성경의 바울 서신에 나오는 칭의의 개념과 개혁주의 신학이 정의하는 칭의와는 다르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이 정의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 단어의 개념이 다르게 쓰인다는 것뿐이다. 여섯째, 양자이다. 칭의가 법정적 면에서의 구원이라면 양자는 관계적 면에서의 구원이다. 인간은 본래 사탄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이 양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일곱째, 성화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조금씩 거룩해진다. 여덟째, 견인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를 영화의 단계에까지 견인차가 끌고 가듯이 그렇게 이끄신다. 그리고 아홉 번째로 영화가 있다.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반사하는 존재가 된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완성되면 이루어진다. 여기 구원의 순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순서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유효한 부르심에 대해 살펴보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0장 1항을 보자.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신다.” 그런데 어떻게 효과적으로 부르시느냐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실 때 외적 방편과 내적 방편을 사용하는데, 외적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이다. 주의 종을 통해 말씀을 전파하게 하신다. 동시에 내적으로 성령은 부패한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죄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낸다. 사람이 태어날 때 어떤 중립의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많은 사람이 상상한다.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 하얀 백지에다가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사후 세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인간관은 이와 다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을 안고 태어난다.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영원한 형벌을 안고 태어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이곳 지옥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이곳 마귀의 왕국에서 건져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구원은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세적이고 현실적이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이 구원이 아니다. 지금, 현세에서, 현실 속에서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