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도자여! 무지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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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교회)

 

기도는 진공의 삶에서 나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기도는 반드시 배움과 경험, 역사와 환경을 통해 삶의 진액처럼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무지하면 성장할 수 없다.

갓난 아이들은 기도가 필요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기도할 정도의 삶의 기한이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의 인지 능력을 갖춘 아이들은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하등종교에서나 이뤄지는 기도이다. 하등종교에서의 기도는 자신의 개별적인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고등종교의 기도는 그것을 넘어 타인과 세상의 문제로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어린이들의 기도는 하등종교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그곳이 끝이 아니라 성장하는 시기이니깐.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교회 안에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바로 하등종교 수준의 기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어린이들이나 하는 기도에 지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 것을 위한 기도를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방언으로 기도하는 수준을 보이면서 마치 기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자랑한다. 다른 나라 말로 기도를 하든 통성으로 기도를 잘 하든 기도의 어휘가 탁월하더라도 그 내용이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곧 어린 아이의 기도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귀히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성한 분량의 기도자로서 받아들여지는 간구는 안 될 것이다.

기도자도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한다. 배움과 경험이 채워지고 역사와 사회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카톡의 찌라시와 인터넷에 떠도는 글로 정보와 지식을 다 채웠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신문을 봐야 하고 신간으로 나온 시대의 책들을 읽어야 하며 검증된 철학가들과 사상가들의 글들을 반드시 읽고 생각하고 정리해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등종교인의 기도를 위해서 그러한 글들과 내용들을 가지고 깊은 묵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한 팔레스타인이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그런데 한 성도는 그 사건에 대해 신문기사와 사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한 글을 읽고, “주님! 미국과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적인 외교정책으로 고통 받는 선량한 팔레스타인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시며, 이로 인해 일방적으로 가해진 억압과 폭력이 먼저 멈추어 또 다른 폭력과 테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주님의 평화가 그 땅에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도는 기존의 단편적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와 기본의 세계사적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유대교 환원주의에 빠진 목회자들의 설교만을 듣고, “하나님! 이슬람을 섬기는 팔레스타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더 이상 테러를 일으키지 않도록 저희에게 불을 내려 주옵소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더욱 지켜 보호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도 그들로부터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지도 모른다.

두 기도 모두 틀리지 않다. 그러나 절대로 후자의 기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도자는 무지함에 빠진 채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자도 공부해야 하고 배워야 하며 알아야 한다. 모르고 기도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기도자는 그 시기에는 인정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배움과 경험, 역사와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수용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은 무지를 죄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무지는 거짓말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알아가는 가장 잘못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진실한 기도자가 되길 원하는가? 많은 시간도 필요하고 큰 소리를 기도하는 훈련도 해야 하며 때론 은사에 따른 기도의 모습도 갖춰야 한다. 그러나 무지함에 머물러 있다면, 결코 기도는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자여! 무지에서 벗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