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꺼져 가는 촛불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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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 참으로 어려운 심방이 있었다. 치매 요양원에 계신 한 권사님의 시어머니를 뵈러 가는 것이다. 심각한 치매증세로 병실에 들어가면, 사지가 침대 기둥에 매어져 있었다. 예배 내내 육두문자로 며느리를 욕하고 목사인 필자도 나무랐다. 그래도 끝까지 어머니를 따뜻하게 대해 드렸다. 때론 침 뱉음을 받기도 하고 그 분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나기도 했다. 그 심방이 잡히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기 싫지는 않았다. 그런 곳을 가고 그런 사람을 만나라고 성직자로 하나님이 불러 주셨으니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가고자 했던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였던 그 성도의 간곡한 마음 때문이었다. 필자는 처음 심방을 다녀온 후에 그 성도에게 “다녀오시면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답은 의외였다. “이렇게라도 더 오래 살아계시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도미해 와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한 권사의 어머니가 별세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때 그 권사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장례가 다 끝나고 위로 예배로 찾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우셨어요?” “목사님, 이제 저는 늙은 고아가 되었어요. 부모 모두 하늘로 보낸 늙은 고아네요.” 병들고 아픈 부모는 세상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일지라도 자녀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결코 떠나 보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연봉으로 따지는 물질만능시대에 병들어 죽기를 앞둔 늙은 부모 세대들은 쓸모 없는 자들처럼 보일지 모른다. 국가의 복지연금이나 축내고, 사회문화에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존재로만 판단할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노인들과 장애인들, 실업 청년들, 어린이들은 상업적 가치와 효율에 매우 마이너스 효과를 내는 존재들이라고 평가되는 세상이다. 차라리 알파고를 사용하고 인공지능 로보트를 이용해야겠다는 발상들이 점점 세상을 지배해 가고 있다.

그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나의 늙고 아픈 부모가 적어도 나에게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실존적 각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 십 년간 “장군! 멍군!”을 외치며 실수와 묘수를 반복하면서도 자장면 내기 장기를 두었던 아버지가 우리의 곁을 떠나신다면, 제 아무리 장기를 잘 두는 알파고의 수 십 대가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전혀 기쁘지 않을 것이다.

노인아파트에 심방을 가면, 하나같이 기도제목이 “빨리 죽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녀들의 기도제목은 자신의 부모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같이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식당에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필자는 당연히 후자를 위해서만 기도한다.

아파도 같이 해야 한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야 하고, 불편해도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은 금전적 가치를 따져 생명을 연장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수명만큼을 살면서, 마지막을 앞둔 자는 지혜를 나누고 이제 막 생명을 시작한 자는 기쁨을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더 효율적인 인간, 덜 효과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동등한 존재이다.

성경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라고 기록한다. 물론 그 이후로는 없지만, 이렇게 덧붙여 볼 수 있다. “노인이나 어린이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병자나 건강한 자나 …”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 땅에 절대로 자신과 같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곧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늙으면 병들어 죽게 될 것이고, 성인군자처럼 살아도 치매에 걸리며 어린 아이가 되어 이기심만 부리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향한 인간애(人間愛)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그 사랑을 잃어 버릴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회복해야 한다. 꺼져 가는 촛불 앞에서 최고의 인간적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사람을 세우는 곳! 이제 교회가 그런 곳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