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꿈꾸는 성도, 꿈꾸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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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치홍 장로(미주장로선교회 회장) 

 

존 번연의 천로 역정에서 기독도가 장만성을 떠나 십자가 아래서 죄의 짐을 벗어 버리고 경쾌하게 천성을 향해 가는 도중 산밑에서 쇠사슬이 발에 묶인채 쿨쿨 자고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였다. “여보시오, 여기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마치 배 돛대 위에서 주무시는 것과 같으니 일어나십시오”라고 할때에 그들은 제각기 기독도를 향하여 빈정거리며 쏘아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무지, 느림뱅이, 철면피라고 한다. 이들은 현 위치에서 만족하는 타락자의 상징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예수님의 제자로서 직무유기를 행하는 자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그 용모가 변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졸다가 깨어 “주여 우리가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고 말할 때에 예수님은 허락지 아니하시고 보다 나은 십자가의 구속사업을 위하여 발을 옮겼다. 잠시만의 황홀감에 빠져 초막을 짓고 거한다면 위에서 말한 잠자던 세 타락자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사명을 부여받은 소명자이다. 그러므로 꿈을 무한대로 키우며 시야를 넓혀 동서남북을 바라보아야 한다. 괴롭다고 산실을 뛰어나와 두다리를 쇠사슬에 비틀어 매고는 만일을 도모하며 시원한 그늘에서 낮잠을 즐긴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내가 선 자리에서 보다 나은 곳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은 매우 고달픈 길이지만 꿈과 비전을 가진자는 보다 나은 곳으로 조금씩이라도 전진해 나아가야한다. 항상 평지에서 산을 모르는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 산을 타는 등산자들의 심취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정상을 정복하는 순간 산하를 굽어 볼때에 터져나오는 감탄사! 그 순간만은 창조주의 솜씨에 감탄할 것이며 가슴 뻥 뚫리는 그 희열을 누가 알겠는가?

교회는 운영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 자리에 연연해 이전투구나 하고 우물 안에만 갇혀 밖을 보지 못하는 곳이 아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세상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와 같이 은혜와 진리가 넘쳐나며 빛되신 아버지의 능력이 이 땅위에 선포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38년된 병자를 찾으려 베데 스다 연못가로 내려가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신앙인이 되기전에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한 거룩한 삶을 위한 경건의 훈련으로 참된 제자로서 세상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 나가야한다. 울타리에만 갇혀 내 교회만 지키고 그 곳에서만 만족한다면 이 땅에 교회를 세운 목적에 배반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육신의 괴롬과 힘들고 지쳐서 죽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경자년 흰 쥐띠 해가 밝았다. 쥐가 얼마나 부지런한가? 양식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라! 새까만 두 눈망울엔 초롱초롱한 광채를 발하고 움직임 조차도 날쎄지 않는가?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꿈 많은 청년시절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꿈을 마음에 품었던 요셉처럼 올한해 우리 시카고 교계가 좀 더 나은 곳을 향하여 연합하며 새로운 꿈을 꾸자. 무엇보다도 그 꿈을 꾸는 주체는 교회마다 헤드인 당회의 역할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성령 안에서 교회들이 거룩한 꿈을 가슴에 품고 일어나야한다. 절망으로 뒤덮인 세상 가운데서 희망을 펼쳐 나가야한다. 진정한 가치 상실과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고 절망과 허무로 고통중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 희망의  빛을 시카고 도성에 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하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고.(골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