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가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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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목사(선한 이웃교회 담임/미육군 채플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마 11:28

 

신장된 한국의 경제력과 국력은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쉽게 알게됩니다. 유럽의 지붕이라고 불리워지는 스위스의 융프라 그 정상에 위치한 카페엔 신라면을 즐기는 한국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됩니다. 프랑스와 이태리 주요 도시들을 걸을 때면 귓가에 들여오는 정겨운 한국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경제력의 성장과함께 여가에 대한 관심이 무척 커진 것을 보게 됩니다. 적당한 쉼이 없이는 우리는 건강하게 삶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쉼이란 몸만 쉰다고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는 마일리지가 많아지면 정비하고 기름칠하면 그만 이지만, 인간은 몸뿐만이 아닌 복잡한 내면의 세계 즉, 감정적, 관계적, 영적인 세계를 가진 총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초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시오!”라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관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힘겹고 지친 영혼을 부르시는 자비로운 음성입니다.  그같은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쉼을 주겠노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쉼은 “나의 멍에”를 함께 지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멍에(Yoke)는 두마리의 황소어깨에 얹혀져서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수 있도록 만든 농사도구였습니다. 이 두마리중 한 짐승은 힘이 쎄고, 경험이 많은 반면, 다른 것은 연약하고, 경험이 부족한 초보의 짐승과 짝을 이루게 하여 한 멍에를 메고 밭을 일구는 일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원한 그늘에 앉아 힘겹게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단지 “이렇게, 저렇게 사시오”라고 말씀만 한분이 아니었습니다. 힘겹게 멍에를 메고 걷는 인생에 자신의 어깨를 내밀며 힘있고 경험많은 안내자가 되어 함께 우리와 걸어가겠노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과 같은 수고를 동반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멍에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멍에”는 인생에 주워진 삶의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불필요한 것을 걸머지고, 수고하는 무거운 짐에 탈진해 버린, 곧  “잘못된 멍에”를 걸머진 인생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는 “헛된 멍에”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염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님은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라!”말씀하십니다.  “내일”이라는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는 바로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킹목사의 말처럼, -“지금 계단을 오늘때 계단의 꼭대기까지 다 쳐다볼 필요는 없어요, 단지 한계단 한계단을 오르는 자세가 중요한 겁니다,”- 내일의 염려를 다 버리고, 오늘을 믿음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그같이 “주와 함께 지고가는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 됩니다.

 

또하나의 불필요한 인생의 멍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때문에 갖게되는 절망감입니다. 고통스런 현실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해 버리고 절망할 때, 우리는 그사건의 배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큰 역사와 계획을 놓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처럼, 이민와서 정착해 살다가 단지 타민족이라는 이유로 쫒겨난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부르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입니다.  그들은 로마에 정착해 살다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추방 명령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집도 직업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어, 고린도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까? 그곳에서 인생최고의 만남이 기다릴 줄을. 사도 바울과의 만남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발견하고 평생 그 길을 걷게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통스런 현실에만 우리의 눈과 귀를 고정하다면, 우리 인생에 더 큰 그림을 그려가시는 주님을 볼 수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지친 인생길을 걷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자비의 음성을 들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servant.s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