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늑대와 도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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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규 목사/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담임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울며 때를 쓰고 있던 아이가 이 소리를 듣자 이내 울음을 그치고는 뭔가 무서운 것이 자기를 잡으러 오는 냥 깜짝 놀라 엄마의 품속으로 달려 듭니다. 이는 옛날 어른들이 아이들이 울고 때를 쓸 때 겁을 주려고 했던 말로 아이들에게 망태 할아버지는 거짓말 하고 부모님 말씀 잘 안 듣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딸아이가 무서워 하던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늑대’였습니다. 동화책 속 아기 돼지들이나 빨간 망토의 소녀를 잡아 먹으려고 등장하는 교활하고 무서운 늑대는 우리 딸 아이가 가장 무서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늑대다~!” 하면 깜짝 놀라며 마치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 처럼 아빠에게로 달려 옵니다. 무엇을 하다가도, 있는 것을 다 놔 두고, 지체 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신속함으로 양 팔을 벌리고 있는 아빠의 품속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럼 저는 딸 아이를 품에 안고 두 팔로 감싸 든든한 울타리를 쳐 주는 것 처럼 보호하는 동작을 취해줍니다. 그럼 딸 아이가 말합니다. “늑대 갔어요?” “아니~ 아직.” 그 말에 딸 아이는 더 깊이 아빠의 가슴을 파고 듭니다. 몇 번이나 재차 물으며 늑대가 갔는지를 확인한 후에야 아빠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갑니다. 저는 그런 딸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짓꿋게도 하루에 몇 번이고 “늑대다~!”를 외치면서 아이를 놀래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아빠 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딸아이가 어릴 적 아빠의 품속으로 달려 들어 오던 때를 생각하면서 지금도 가끔 “늑대다~!” 하면 “저리가~”라고 말하며 사뭇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곧 대학생이 되는 다 큰 아이에게 꼬마 시절 장난이 통 할리가 없는 것이죠. 이제는 잘 커서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에 대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웬지 모를 서운함과 섭섭함이 가시질 않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 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민 35:11-12)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를 죄인이 피의 복수자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마련된 특별한 제도였습니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다시 새 생명을 얻게 된 영적 원리를 보여주며 진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도피성으로 들어 올 때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자는 조금도 지체할 수 도 없었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우므로 안전한 땅으로 피하는 이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해 관계를 포기해야만 하였습니다. 피로도 잊고 어려움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도피자는 그 성벽 안에 도달하기까지는 감히 한 순간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피의 복수자가 들이 닥쳐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신속해야 합니다. 이제는 속히 도피성 되시는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 가야 합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집어 삼키려고 우리 앞에 여러가지 세상의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재물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정욕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욕심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돌아보느라 지체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일 보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우리가 달려 오기만은 기다리고 계시는 우리 주님, 그분의 품 속으로 무엇을 하다가도, 있는 것을 다 놔 두고, 지체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신속함으로 달려 들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