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연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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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대체 왜 야곱이냐 말이다. 야곱은 교활하다. 남 속이기를 뱃속에서부터 하던 자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시각장애인 아버지의 신체적 약점을 이용하여 속여 먹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어머니가 대신 저주를 받겠다는데 말릴 생각도 않는 불효막심한 인간이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왜 하필이면 야곱인가.

어디서 많이 듣던 질문 아닌가? 그렇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끊임없이 제기했던 문제다. 왜 하필이면 세리와 창기들인가? 왜 예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가? 이것은 소위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형의 질문이기도 하다. “왜 평생 아버지께 순종한 내가 아니라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한 저 못된 놈을 위해 잔치를 베풉니까?” 포도원 일꾼 비유도 빼 놓을 수 없다. “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우리와 오후 늦게 와서 잠시 일한 저들을 똑같이 취급하는가?”

내가 누리는 건 당연한 권리이고, 저들이 누리는 건 부당한 특혜다. 왜 시민권자들과 ‘불법체류자들’(서류미비자들)을 똑같이 취급하는가?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저들이 혜택을 누려야 하는가? 왜 이민자들이 우리의 직업을 빼앗도록 내버려 두는가? 왜 야곱인가? 왜 둘째 아들인가? 왜 늦게 온 일꾼들인가? 왜 이방인인가? 이처럼 ‘나의 당연한 권리’와 ‘저들의 부당한 특혜’를 외친 이들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명료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초등학교 때 석주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약국 집 아들이었다. 집은 당연히 부유했다. 친구는 키가 크고 공부도 뛰어나게 잘 했다. 아이큐 검사하던 날이 생각난다. 정작 내 아이큐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친구의 아이큐는 정확히 기억한다. 152! 이걸 아직까지 기억하는 이유가 뭘까. 나와는 애초에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을 미리 깨달았던 건 아닐까.

누구에겐 너무 당연한 것이 다른 어떤 이에겐 전혀 당연하지 않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부유한 집에서, 다른 누군가는 가난한 집에서 출발한다. 누구는 서울에서, 누구는 지방에서 출발한다. 누구는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고, 누구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다. 출발선이 다르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누군가는 처음부터 5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 저 앞에 에서가 있다.

에서에게 당연한 그것이 야곱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곱은 도전한다. 장자권은 오직 첫째 아들 것이라는 상식과 관습과 전통에 질문한다. 물론 방법은 옳지 않았다.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를 것이다. 에서도 특권을 당연하게 여긴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법,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것들이 전복된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세상이 펼쳐진다.

하여, 우리는 물어야 한다. 에서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특권들은 무엇인가. 여자가 아닌 남자로서 누리는 특권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서 누리는 혜택은 무엇인가. 서류미비자가 아닌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로서,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서,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로서 이 사회에서 누리는 특권은 무엇인가. 내게 있는 것 중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 당연하게 여기면 결과는 같을 것이다. 먼저 된 자, 나중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