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제사장이 죽을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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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규 목사/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담임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 피의 복수자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마련된 특별한 제도였습니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도 예수님께로 나오면 누구든지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그림자입니다. 그럼 도피성으로 도망 온 죄인은 언제까지 그 성에 머물러 있어야 했을까요?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민수기 35:25, 28) 그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에 거주 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자기의 땅으로 돌아가 자유함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한 살인자는 비록 그 생명을 보호받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살인의 댓가인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단지 죽음이 보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의 생명이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죠.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즉 피 흘린 자는 반드시 피에 의해서만 속(贖)함 받을 수 있다는 ‘보응의 원리’(창 9:6, 레 17:11)에 의해 대제사장의 죽음은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의 피 흘림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는 그 살인자가 치뤄야 할 죽음의 값을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속(代贖)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속사적 견지에서 볼 때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그 죄값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도 십자가에 대신 피 흘려 죽으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속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

지난 8월 29일 애리조나 피닉스 국회 의사당에서 진행된 죤 멕케인 상원의원의 장례식을 보면서 온 미국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는 공화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신념과 미국이라는 자신의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면 당파를 떠나서 신념 있게 행동하는 정치인으로 모든 미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뇌종양으로 투병했던 그는 그의 죽음 1년 전부터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했습니다.  장례식 장소와 참석자 초청, 조사 낭독자는 물론 연주될 곡과 낭송할 시, 관을 운구하는 동선에 이르기까지 매주 금요일 그의 참모들과 모여 장례식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 죽음까지도 모든 미국인들을 향한 무언의 메시지가 되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죽음을 맞았을 때 온 미국은 애도했습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서 그의 죽음을 바라본 제 자신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 분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억되는 것입니까? 객관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보면 뭐 대단한 게 있습니까? 큰 권력이나 재산이 있었습니까? 훌륭한 자식을 두었습니까? 아무 가진 것 없이 무력하고 비참하게 죽은 나사렛 시골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2천 년 넘게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여전히 그분의 죽음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죽으심, 곧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분의 죽으심은 이렇게 기억되고 기억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따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 십자가가 나를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차리는 밥상이 나를 위한 밥상 일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일을 마치고 밤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위하여 자지않고 기다리는 아내가 있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어린 자녀가 삐뚤어진 글씨로 쓴 작은 카드에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써 있으면 우리는 감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하여 쓴 것이니까요.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인 것을 생각할 때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가 자유함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대제사장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이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함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길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 사실 이것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