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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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선교지에 나가면, 보통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현장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병고치는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 의료선교를 위해 함께 간 의사나 간호사보다 더 많은 아픈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선교지의 언어에 능통하게 되어, 곳곳을 다니면서 신나게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렇게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언어, 곧 지역 방언을 잘 하다가도 본토로 돌아오게 되며, 언제 선교지 방언을 했었는지도 모르게 전혀 방언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를 다녀온 사람들은 “이것이 은사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은사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은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도구라는 것이다. 은사는 교회가 잘 되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일부 신자들은 은사를 훈장이나 직분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한 교단에서는 ‘방언’이라는 은사가 구원의 표징처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사는 철저히 교회를 위한 도구이다. 은사를 받았다고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거나 직분 상승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은사는 거저 주어진 것이다. 은사는 선물이다. 내가 수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일뿐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회에 몇 번 참석해야 방언을 받을 수 있고, 이단에 가까운 신령한 사람에게 기도를 받아야 신유은사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다. 은사는 하나님이 그 분의 기준에 따라 거저 주시는 것이다. 잘 했다고 주는 것도 아니고, 잘 못했다고 안 주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무작위로 베풀어지는 것이 은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영적 구원이나 하나님의 편애, 교회의 권위를 자랑하거나 뽐내려고 하는 것은 유치한 일일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면서, 바로 그 다음 13장에서 “사랑의 은사”를 이야기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가! 인간적인 기준으로 은사라 함은 자랑하고 드러내기에 너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되, 그 은사는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고전13:7)고 증거한다. 은사는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높은 자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영혼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방언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거짓이고, 신유은사가 영적 지도자가 되는 기준이라는 것도 헛된 말이며, 예언이 신자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일 뿐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은사가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받고자 노력해야 한다. 방언을 하지 않아도 사랑이 있다면 교회는 건강해질 것이다. 예언의 기도가 없어도 사랑이 있다면 공동체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현대교회의 어려움과 신앙공동체의 와해 이유는 진정한 사랑 없음에서 출발한다.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지키며 가족을 온전하게 하는 사랑, 곧 무엇보다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리라 믿는다.

사랑의 은사만이라도 교회와 성도가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교회는 회복할 것이고 믿음의 사람은 채워질 것이다. 사랑만 빼고 다른 것에서 신앙을 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