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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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기쁨의교회 담임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보면,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로 말씀한다. 두 가지 표현으로 나눠진다. 먼저는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우다’는 뜻은 학교에서 수업듣고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며 이해하게 됨을 말한다. 즉, 배우는 것은 진리를 알고 깨닫으며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뜻은 그렇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며 이해한 것을 믿게 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차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것과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은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다. 배우는 것이 곧 확신한 일에 거하게 하는 것이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 배우는 것의 당연한 연속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거나 성경의 진리에 대한 과정일 때에 더욱 적용된다. 곧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신앙의 행위는 배우고 확신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행위로만 그쳐서도 안 되고, 그저 하나님을 믿겠다는 맹목적인 믿음의 행위도 결코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배우고 아는 것은 믿음과 동시적으로 이뤄질 때, 그것이 신앙이 된다는 것이다.

중세에 하나님을 믿음과 이성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Credo ut intelligam)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이해는 믿음이 필요하며, 믿음은 또한 이해가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셀무스 시대로부터 1000년이 지난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이해와 믿음이 함께 공존하는 신앙을 지켜내고 있지 못하다. 도리어 더욱 퇴보하여 믿음만을 강조하는 게토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구호는 안셀무스의 ‘이해’와 디모데후서 기자의 ‘배워야 함’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을 비롯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해와 배움, 깨달음과 앎이 전제 되어야 함을 줄기차게 이야기해 왔다. 참 믿음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교회와 성도들은 앎의 과정과 배움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믿음을 강조하거나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는 목회자와 교회는 더 이상 신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인 제임스 패커는 무신론자들과 잘못된 신앙인들의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채 살려고 애쓰는 것은 무신론자들이나 맹목적인 믿음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믿는 자들은 배우는 것과 이해하고자 하는 것에도 반드시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고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 것의 방법론과 도구는 세상의 과학과 지식만을 말하지 않는다. 꽃을 생각해 보라. 꽃의 아름다움(美)을 알고자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방법론은 식물학과 생물학보다는 시와 노래가 더욱 필요하듯, 세속의 과학과 철학만이 배움과 앎의 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문화와 문학, 인간의 무의식과 감성도 하나님을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에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떠한 방법과 도구로 하나님과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알고자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풍족한 믿음의 삶을 추구할 수 있다. 문제는 무조건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신앙을 함께 가지지 않는다면,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이제는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배움과 이해 없이는 이제 더 이상 선교도 불가능하다. 내가 이해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해서 벌어진 수많은 기독교의 불신과 비난을 우리는 기억해 한다. 더욱 알고자 해야 한다. 더욱 배우고자 해야 한다. 더욱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그 과정이 곧 믿음의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