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선택된 그릇 (Chosen V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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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목사 (선한 이웃 교회 담임/ 미 육군 군목)

우리집 뒷마당엔 밑둥이 잘린 나무의 뿌리가 여전히 땅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긴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엄청난 크기의 나무가 그곳에 서있었던 갔습니다. 이사오기 전에 이미 베여져 있었는 데,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뒷마당의 조경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남겨진 뿌리가 워낙 크고 깊어서 그곳에 무엇을 심으려 해도 삽조차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하고 딱딱한 땅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곳에 4년째 흙을 덮고 꽃씨를 뿌려놓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뒷마당 주위를 걸어가는 이웃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꽃동산으로 변해가는 정원의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황량하던 뒷마당의 모습이 변하여 정원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은 마치 주님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거대한 나무뿌리처럼 인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과거의 세상의 영향력은 이제 그 밑둥이 베어져 생명을 잃고, 이제 그 곳에  새로운 씨가 뿌려지고 새 생명이 자라나 꽃을 피우는 동산이 되듯 주님안에서 피어난 새 생명의 동산을 이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 여겨집니다. 죄의 유혹과 육신의 도전이 여전히 우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제 어떤 양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죽은 뿌리일 뿐입니다. 성도를 유혹하는 죄의 영향력이란 마치 뱀의 머리가 여인의 발꿈치에 무참히 짓밟혀진 것처럼, 성도의 삶은 죄의 횡포와 그 역사를 주님안에서 산산히 깨뜨려버린, 이미 승패가 결정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백성들은 한낱 죽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악이 역사하는 최적의 환경인 이 세상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가르켜 정의하기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한 곳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통제되지 않은 정욕대로 육신의 삶을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마치 부레잌없는 난폭한 질주를 꿈꾸는 욕망처럼 우리안에 통제할 수 없는 가공할 육신의 정욕을 따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정욕에 휘둘린 삶은 피투성이일 뿐입니다. 자신과 타인의 파멸을 겪고나서야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뒤에 숨어버린 아담처럼, 욕망이 가져다 주는 파멸과 죽음을 맛보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선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세상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지만, 주님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으시고, 새롭고도 영원한 길을 걸으며 인류에 선명한 그의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진리요,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모든 이들에게도 이 땅을 살면서도 영생의 삶을 맛보는 믿음의 신비를 체험케 한 것입니다.

 

성도란 바로 죄로 이끌고가는 육신의 권세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요, 주님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여전히 육신을 가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1)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미 죽었고, 내 몸에 이젠 주님이 사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도구(Vessel) 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우리 몸의 주인처럼 행세하던 육신의 죄의 권세는 이제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더이상 육신에 끌려가며 속박당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죄의 세력은 밑둥이 잘려나간 생명잃은 한낱 나무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도구요, 주님의 영광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는 삶, 이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서 잘 닦여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싱크속 꾸정물에 담궈논 그릇처럼 살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릇이 좋은 그릇, 나쁜 그릇, 잘 못 만들어진  그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잘 준비되어질  때 쓰여질 뿐입니다. 이같은 주의 은혜가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