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쓸데 없는 일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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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교회)

예수는 수난의 때를 앞두고 있다. 어느 때보다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 하고,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 반대의 사람을 만난다. 마가복음 14장3절에 보면, 예수는 나병환자 시몬과 이름없는 여인과 만나 식사를 나눈다. 그 앞절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월절 기간에 각 고향에 모여 있는 백성들이 예수를 지지하여 민란을 일으킬까 걱정하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런 순간에 예수는 도리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그룹을 만나, 자신을 변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모임을 갖는 것이 정상일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을 만나 대중적인 힘을 얻어 민란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가 유대 율법으로는 버림 받는 존재와 같은 나병환자와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증거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그러한 예수의 행적은 쓸데 없는 것이라고 치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예수가 나병환자 시몬과 이름없는 여인을 만난 기록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설명한다. 특별히 바로 그 쓸데 없이 보이는 모임 가운데, 여인은 예수에게 값비싼 향유옥합을 바친다.(막 14:3) 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막 14:4-5)라며 그 여자를 책망했다고 한다. 예수가 중요한 시점에 나병환자와 여자와 만남을 갖는 것도 쓸데 없는 행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그 여인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만큼의 값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부어 드리는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수난의 때를 앞두고 쓸데 없는 일의 반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쓸데 없는 일이 벌어진 사건 속에서 교회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예수를 잡아들이고자 계획했던 내용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가? 예수를 정치 혁명가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복수심을 만족하려고 하는 시대상황을 기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예수는 이미 이런 예언을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그 중요한 시기에 예수는 쓸데 없다 여겨지는 나병환자와 여자와 만남을 가졌다. 또한 이름 없는 여인은 당시 노동자의 1년 연봉이 되는 값비싼 향유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붇는 쓸데 없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쓸데 없는 사건의 반복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지금까지도 예배와 말씀 가운데 기억되고 있다.

예배와 기도는 무의미와 허무한 반복적 행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C.S. 루이스는 “악마의 편지”에서 사단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궁금해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짓”이라고 속삭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악마의 속삭임은 “왜 쓸데 없이 그 귀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쓸데 없는 일의 반복이 행해지는 것이다. 예수가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만나고 민란을 일으킬 백성들 가운데 리더십을 밝휘하면, 그것보다 유의미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안에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없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 쓸데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고, 주님 앞에 거룩한 낭비가 이뤄질 때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신앙의 모습을 세워진다고 몸소 보여준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이다. 매해 보내는 사순절이기에 우리는 반복적인 절기에 쓸데 없는 시간이라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반복과 낭비 속에 하나님은 가치와 의미를 허락한다. 기도하고 있는가?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결코 낭비가 아니다. 그 쓸데 없는 시간이 곧 십자가를 통해 은혜의 유의미를 경험하게 될 것을 생각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시간을 채워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