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버지라 부르라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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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예수님은 정말로 피곤한 일상을 보내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분의 가르침을 듣기 원했습니다. 주님 주위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일이 보듬으시고 치유하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이 보낸 정탐꾼들과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항상 섞여있어 그들과 논쟁 하셔야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하루에 한 순간도 조용히 그리고 편안하게 쉬실 수 있는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일상이었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렇게 피곤하고 분주한 하루의 시간을 보내신 주께서 잠깐 자리를 비우고 어딘가를 다녀 오시면 이내 그의 온 전신이 새로운 활력과 상쾌한 분위기로 완전히 전환 되셔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궁금했습니다. 무엇이 우리 주님의 피곤한 몸을 이리도 일순간에 활력 있고 힘있는 모습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일까? 그리고 이내 그 비결이 바로 주님께서 아침과 저녁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하셨던 당신의 기도로부터 나오는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갖게 되자. 제자들은 그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그런데 당시의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말그대로 기도의 민족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도에 익숙했던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의 눈에 유대 지도자들이 하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도 지적하고 있는 바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기도를 외식하는 자의 기도라 규정하시며 경계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믿음이 없는 기도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요 특별히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마 6:5)”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께서 친히 당신이 기도하시던 방법을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주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첫번째 레슨은 기도를 받으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의 호칭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호칭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우리의 유일한 영적 아버지 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가르침 속에 아주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요 그 사랑으로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 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이 이 아버지라는 호칭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