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월남적화처럼 내부의 적을 경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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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한미자유연맹 부총재)

1975년 적화통일이 되버린 월남의 결정적인 적화원인은 바로 내부의 적 즉 공산월맹과 내통하면서 월남의 안보, 국방, 경제, 인물등 결정적 정보를 넘긴 월남내부의 간첩들의 암약이 크다. 특히 이들은 월남내부의 친공산 월맹세력들과 연합하여 미군이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맺고 철수 한후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 이러한 비슷한 사례들이 최근까지 대한민국에도 발생하고 있어 큰 우려가 된다.

지난 10월11일 영국 BBC 방송이 보도한 탈북자 김국송(가명)씨 인터뷰 기사내용이다. 2014년 탈북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인 정찰총국 대좌(우리의 대령)로 고위 공작원 출신인 김씨는 1990년대 초 북한 간첩이 청와대에 침투하여 5~6년간 근무하다가 무사히 북한으로 복귀해 314연락소에서 근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같은 분단국가인 남월남·북월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월남은 북월맹의 간첩들로 멸망했다고 할 정도이다. 1967년 남월남 대선에 출마해 17%나 득표한 쭝딘쥬라는 변호사는 월남 패망 이후에야 북월맹의 간첩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남월남에선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의식 있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쭝딘쥬는 월남 공산화 후 북월맹의 자문 역할을 하다가 91년 사망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유학 중이던 그의 아들은 1978년 공산 베트남 정권을 위한 간첩 활동을 벌이다 미국 FBI에 의해 체포돼 재판에 회부돼 버리기도 했다. 어쨌건 남월남엔 북월맹의 간첩들이 정말 많았었다. 1967년 10월1일 월남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총당선자 137명 중, 공산프락치로 의심되는 의원이 24명이나 있었다고 나온다. 이는 하원의원 총원의 18%에 해당한다. 즉 남월남 권력층에 17~18%는 북월맹의 지령을 따르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청와대에 침투한 여간첩 김옥화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1968년 이른바 1·21사태, 즉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이 1·21사태 직후 북한 공작원들의 유류품을 분류·분석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내부 약도가 발견됐었다. 그런데 내부 약도가 너무 정확해 당시 대공수사 관계자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내부 약도와 경호원들의 배치 실태등을 상세히 알 수 있었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공수사팀은 청와대 안에 북한의 간첩망이 침투해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전 직원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조사를 했었다. 그 결과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서인 김옥화가 대상자로 지목됐다. 김옥화는 국내 유명 여자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했는데 거기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을 했다. 바로 남편이 북한에 이미 포섭된 간첩이었다. 김옥화는 유학을 마치고 청와대에 들어가 경호실장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김옥화는 경호실장을 수행하여 청와대 경내를 제한 없이 들락거리며 확인한 내부 약도와 경호인력에 관한 내용을 남편에게 전달했고 이것이 고스란히 북한으로 전달된 것이었다.

김옥화 사건은 직파간첩이 아니라 간첩에 포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사한 경우로 ‘지하당’ 입당을 들 수 있다. 북한체제를 건립한 김일성은 전쟁수행을 위해 전투사령부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 혁명을 위해 혁명을 주도하는 ‘혁명의 정치적 참모부’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이 필요하다고 역설해왔었다. 김일성은 레닌의 소위《당건설론》과 《소수 정예의 직업혁명가론》에 따라 6.25의 실패와 4.19를 결정적 시기로 연결치 못했던 요인이 혁명을 지도할 이른바 지하당부재에 있는 것으로 봤었다. 그래서 간첩침투를 통해 지하당 구축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지하당은 쉽게 말해 중앙당인 평양 조선로동당의 남한 내 숨겨진 지하의 정당이다.

내부의 적을 경계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