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종교 개혁 5백년 진실 없는 시대와 한인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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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모 논설고문/사회학 박사

‘프로스펙트’

5백년 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 조의 토론 제안을 걸고 교황청에 항의했던 출발은 사람들을 죄책에 묶어 지옥 면죄부를 판매하던 부패 문제였다. 1520년 루터는 “모든 신앙인이 자기의 사제” (priesthood of all believers)라는 ‘만인 사제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진리를 인정한다면 그들은 우리 위에 권력을 행사할 권한이 없다”고 교권에 도전한다. 세상만사 통제(locus of control)가 타의에 의해 된다는 우리 민족의 권위지향성 사고는 루터 이전의 신앙 바탕이다. 개인이 신 앞에 자기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의식과 의례적 행위없이 “믿음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는 이디올로기가 루터 개혁의 성공 기본 요소였다. 그 시대는 유럽사회 모든 부면을 통제하던 교황의 권력을 타도하려는 민족 국가의식이 움트던 태동기였다. 그 정치적 계기에 프레드릭 성주가 루터를 교황청의 암살에서 보호하며 성경 독일어 번역을 밀어부쳤다. 또한 문명의 변환을 가능케 하는 새 테크널러지인 활자 인쇄술 출현에 루터는 익숙했고 개혁을 성공시킨 도구였다.

맥 다방의 밤 9시. 종업원들이 퇴근 준비를 하는데 한인들이 옹기종기 버티며 담소에 빠져있다. 맥도널드 ‘3부 예배’가 미래 재미 한인교회의 모습이라면 종교개혁을 모독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레이 크록이 1954년 맥도널드 창설 전에 황금색 아취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어 먹고 떠들며 즐기는 ‘맥도널드 처취’의 비전을 보았다. 맥도널드의 한인 모임은 2차 산업혁명 시대에 떠난 ‘지역-혈연 공동체’를 재현한다. 4차 산업혁명 AI와 정보시대에 한인들은 구강기 종교  (oral-re-legion)로 퇴행하고 있다. 먹고 마시고 떠들어 입을 즐기는 사람들이 군대 규모로 재집결을 한다는 뜻이다. 그 구강기 재집합 아류에는 수없이 늘어가는 한인 합창단 (vocal group)들과 미식가 그룹들도 속한다. 먹고 즐기는 문화에서 교회들의 ‘성도의 교제’를 밀어낸 무료급식과 그 연장선의 노인 학교들도 있다. 이런 교회들이 10년 내에 사라진다는 모 교수의 예보나 교회가 문닫을 때도 업적을 자찬하는 멋진 축제의 예를 들은 신학교수의 말이 농담은 아니다.

한편 차세대 영어권 교회들은 구약 10계명의 메시지에 매인 목사에 의해 예수 출현 이전 유태교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 영어권 1.5세 목사가 1세 한어권 교회로 U-턴하는 모습은 맥 다방으로 역진행할 슬픈 장래상이다. 한편 탈교회 차세대가 빨려들어가는 IT (정보기술)는 테크널러지 교회를 형성한다. 도처에서 사용자의 일거수일투족 정보를 입수, 음악으로 속삭이며 비디오로 온갖 탐욕을 자극하고 충족시키는 IT (정보기술)이 새로운 신으로 등극한다. 얼굴 맞대는 공동체나 영혼을 문제 삼지 않는 그 쾌감충족의 종교(rel-tertainment)가 막강하다. 훼이스북의 멤머 1억5천만이 매일 평균 50분을 소셜넷웍에서 예배드린다. 그 IT종교는 가상의 현실로 도피와 카탈리시스로 구원을 대치하며 인간애와 소속감을 준다. 하지만 공동체가 없고 영혼과 삶-죽음의 의미를 다루지 못하니 우리 차세대를 맡길 곳은 아니다.

‘진리 이후 시대’ 도래에 트럼프를 비난하지만 그전에 유태교-기독교 텃밭에 사제들과 맹추자들이 진실과 허위를 헛갈리게 했다. 이들은 갑질하는 자의 파워와 테러-납치범의 폭력을 진실보다 존경하며 자기를 동일시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는데 익숙하다. 권위자들의 착탈을 당연히 받아들인 순복성을 미덕으로 착각케 한 미신종교성은 한인 단체들의 분열과 공금유용 행위를 “언론이 침묵한 탓”이라고 책임전가한다. 하지만 자기네 목사의 거짓말과 교회 공금횡령에는 “하나님의 종을 인간이 징벌할 수 없다“는 징벌공포증 맹추 심리가 이들의 ‘아킬레스 건’이다. 새 개혁의 첫 방해꾼은 노예제도 폐지 2백년 시대에도 ”주님의 종”을 따라가는 노예근성 신자들이다. 죽음을 저항해 이긴 예수와 교황에 대항한 루터에 비해 우리 교회에서 ”바른 일을 하자”는 용기는 훨씬 키가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