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난 발자국을 돌아보며 미래를 예기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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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모 논설고문

“프로스펙트” 

동양인의 미국 이민을 허용한 1965년 이민법 개정이후 1970년 연방 센서스는 시카고 한인을 1,666명으로 추정했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밭 노동이민 이후 1990년대까지 미국의 한인 집중지역으로 시카고는 3위에 들었었다. 시카고 한국일 보사를 내가 떠난 것은 1990년 4월30일. 1971년 12월에 입사한지 19년 4개월 만이었다. 1970년대 초기 동포들의 대량 이민이 시작된 지 불과 20년 고비를 넘던 때다. 당시 미국은 소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영국계-개신교도)의 우월주의가 공공연히 통하던 때였다. 1960년대 이후 미국 정치-경제와 사회를 지배하던 소위 Anglo-Conformism 이념은 WASP 백인들이 미국사회를 주도하며 모든 인종-민족(ethnic) 이민 그룹들이 백인 우월주의 ‘인종의 용광로’ (melting pot)에 녹아들게 된다던 시대다. 어떤 사회학자는 여러 인종들이 잡혼을 계속하면 몇 세대 후에는 피부색이 백인, 흑인도 아닌 현대 인디언에 유사한 엷은 유색인종 Americans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이런 미국 사회 모델에서 우리 한인들은 변두리 소수자(marginal minority)들이었다. 한인사회의 키워드는 언어장벽 (language barrier)에 부딪치며 문화의 충격(cultural shock)을 앓는 것이었다. 처음에 시카고 한인들이 주로 종사한 업종은 2차 대전 전후 중서부에 융성한 제조업 공장들의 막 노동직이었고 그 직장에서 저축한 캐쉬와 친지들 간의 곗돈을 모아 시작한 자영업자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생존의 요구 충족이 모든 가치에 우월하던 당시 자신의 학력과 한국에서의 직능 배경을 속이면서라도 취업하는 행운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무지몽매한 타 민족 이민들이 가던 그 행로를 우리도 갈 수밖에 없이 절박했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우리들 서로 정당화해 주었다. 그런 용감한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던 한인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고 이민들의 교회는 그 거짓의 기능을 용납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민전의 학력에 걸맞던 신분-지위를 상실한 격차감(status discrepancy)을 보상해 주는 집사-장로 신분-지위를 남발해 주는 제도적 단체로서 교회의 타락은 시발했다. 한인 교회는 이민 정착을 위해 아파트와 직장을 구해주는 안내와 생활정보 교환의 터전으로 소위 공항 목회(airport ministry)가 기능 모델이었다. 그리고 좌절된 심리적 충격을 위안하는 기능(comfort function)을 했다. 이 당시 모국에 부모형제들을 두고 온 한인들의 주요 관심은 분단된 조국의 안보문제였고 한국어 신문이 모국 소식을 전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매체였다. 그러나 모국어를 사용하는 언론매체의 성공과 한인 교회들의 번창은 동포들을 영어가 불필요한 모국어 사용 생활 영역 안에 가두는 역기능을 했다. 또한 거짓의 일상화와 대인간에 발생하는 부도덕을 통제하려던 언론은 오히려 “죄인들을 용서하며” 교회의 수량적 성장을 추구하던 목회자 집단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한편 1988년 모국이 세계 올림픽을 계기로 ‘한강의 기적’을 입증하던 때에 동포들의 역이민 개념이 등장했고 연간 3만명을 넘던 미국 행 이민에 의문표가 붙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980년대 말부터 흑인들의 실패를 아시안 특히 한인들에게 덮어씌운 ‘한-흑 갈등’은 뉴욕 ‘레드 애플 청과상’ 보이콧, 1990년 시카고 로즈랜드 한인상가 보이콧, 1992년 L.A.의 4.29 폭동 등, 백인들 죄악 역사의 피해자인 흑인들의 한을 한인들에게 씌워 희생양을 삼던 때였다. 그 누명은 벗기지 않은 채 미국의 정치인들은 소수민족의 투표권에 맛을 들여 인종-민족들의 정체성(identity)을 존중한다며 문화적 복합주의(cultural pluralism)를 앞세워 한인 투표에도 접근했다. 그리고 4분의 1세기가 지나 우리 후세들이 백악관과 연방 의회에 들어가게 됐다. 국민 소득 80달러 때에 내가 2백 달러를 갖고 떠난 모국은 지금 세계 10대 경제권에 들었다. 그 풍요한 착각이 모국을 도덕적 부패에도 선두를 달리게 하는 반면 굶주리던 북한은 핵 미사일 개발에 성공, 미국 본토를 협박하며 맞상대로 뛰자고 한다. 그런데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랑하던 초강대국 미국의 민주주의는 회교권과의 문명의 전쟁에 말려들었고 러시아와 중국에게 조롱당하며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게재에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