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팝콘과 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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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어떤 정신분석가가 스스로 팝콘이라고 생각하는 한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그가 몇 년간 열심히 치료하여 팝콘 환자는 거의 완치가 되었다. 정신분석가가 퇴원을 앞둔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환자가 대답했다. “저는 사람입니다.” 이제 다 나았다고 판단한 정신분석가는 환자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병원에서 나간 지 채 5분도 안 되어서 환자는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외쳤다. “의사 선생님, 밖에 병아리가 있다고 말해 주셨어야지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그 말을 들은 정신분석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팝콘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자 환자가 대답했다. “물론 저는 그렇게 알지요. 하지만 병아리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에 빗대어 보면, 요즘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신도 변하고, 세상도 달라지고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취적이다. 변화하는 세상만큼이나 자신도 발맞추려고 한다. 세상을 이끄는 리더그룹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은 세상이 달라졌는데, 자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양 쪽의 갈래가 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변하는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좋은 전통과 과거의 지혜를 굳건히 붙들고자 한다. 세상을 양 날개로 날아가는 새로 비유한다면, 꼭 필요한 부류이다. 또한 진보적인 사람들은 세상이 후퇴하는 길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신념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미래와 내일에는 더 나은 세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철학과 이념을 세상에 적용하고자 노력한다.

세 번째는 앞에서 이야기한 팝콘과 병아리의 환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자신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세상을 변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변화의 의미를 잘 모른다. 변화의 한자어인 ‘변’(變)자는 “말을 잇다”라는 뜻의 ‘련’자와 “두드리다”라는 뜻의 ‘복’자가 합해져서 ‘변’자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련’자는 두 개의 실이 이어지는 형태를 의미하고 ‘복’는 막대기로 무엇인가를 두드리거나 치는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곧 변화의 ‘변’은 상호적인 상황과 조건 속에서 다양함이 추구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는 반드시 외부의 요인과 환경의 변이에 반응하는 것이다. 과거 팝콘 환자가 자신이 더 이상 팝콘이 아님을 확신했을지라도, 자신의 변화가 외부의 환경과 상황에 상호 작용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닐 때에는,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님을 깨달았어야 했다. 따라서 나는 변했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팝콘 환자의 문제가 발생될 것을 늘 염두하며 살아야 한다.

마지막은 나도, 세상도 변하지 않았고,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40년 전, 필리핀의 루방섬에서 일본의 패전을 알지 못한 채, 혼자 진지를 만들어 놓고 전쟁 중이었던 ‘오로다 히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시 상태를 유지했다. 자신도 변하지 않았고, 세상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간 오로다 히로는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양 쪽 다 변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그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자신을 묶어 그곳에서만 살 수밖에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요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장단이 있을지라도 첫째에서 셋째 부류에 속하여 서로 대화를 하면 성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많은 교회들이 마지막 부류에 속해, 그들만의 리그를 세우고 있지는 않는가 걱정이 된다. 여전히 팝콘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세상에는 병아리들만 살고 있는 무서운 곳이라고 믿고 자기들끼리만 묶여있고자 하는 교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각오가 필요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