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필요를 채우는 교회

320

 

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사무엘상 21-22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어 놉이라는 지역의 아히멜렉 제사장을 찾아 간다. 그런데 다윗이 놉의 성소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먹을 것”이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기고, 백성들로 하여금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라는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되자,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고자 결심을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듯 다윗을 궁전에서 빠져 나가게 도와주지만, 다윗은 밥도 먹지 못하고 옷도 챙겨 입지 못하는 도망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바로 가게 된 곳이 놉이었다.

물론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도 다윗이 그곳에 온 것이 놀라서, “혼자 오셨습니까?”(삼상 21:1)라고 묻는다. 그러자 다윗은 괜한 의심을 받을까 사울왕의 비밀 임무를 맡고 있어서 혼자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삼상 21:2) 그러나 그런 대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다윗에게는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허기’였다. 그는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제사장님이 혹시 무엇이든 가까이 가지신 것이 있으면 좀 주십시오. 빵 다섯 덩이가 있으면 저에게 주십시오. 그렇게 안 되면, 있는 대로라도 주십시오.”(삼상 21:3) 그런데 때 마침 먹을 수 있는 빵은 없고, 율법에 따라 성소에 놓여진 빵만 있는 것이다. 율법과 규례에 따라서는 제사장 마음대로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다윗의 굶주린 상황을 본 후, 그에게 성소에 드려진 빵을 준다. 이 장면을 유진피터슨목사는 “아히멜렉은 종교 규정을 접어 두고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주었다. 아히멜렉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소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어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 규정의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을 간파할 줄 알았던 그는 다윗에게 빵을 내어 주었다. … 천여 년 후,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율법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을 따른 아히멜렉을 넌지시 칭찬하셨다.(마 12:1-5)”고 말한다. 율법을 냉정하게 적용해야 하는 아히멜렉이 굶주린 다윗에게 율법에 따라 성도에 드려진 빵을 건넨 것은 사실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교회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율법과 규율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고, 치유와 회복을 지켜 주시는 곳이다. 굶주린다는 것은 먹을 자유를 갖지 못한 것이고, 병 들어 있다는 것은 치료 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것을 찾아주고 회복시켜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수 천 년 전에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그런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은 칭찬하셨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어떤가? 역행하는 교회와 같다.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내고 있고,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교리가 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나고, 손가락질 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100만불 부자가 150만불을 채우게 해 주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세탁소 2개에서 3개를 운영하는 인간적 만족을 채우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곧 먹고 마시고 잠자고 쉼을 통해 한 번 웃을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주고 채워 주며 회복시켜 주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장발장으로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시민 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자들이 바로 “레 미제라블”, 곧 장발장과 같은 한 끼도 먹지 못해 빵을 훔쳐야 했던 프랑스의 불쌍한 국민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들에게 선의와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은 천주교 예배 때 사용해야 하는 은촛대까지 장발장에게 주었던 미리엘 주교였다. 바로 장발장이 6월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동기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용서와 관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소설 장발자의 “미리엘 주교”가 현대 교회에 있는가? 우리의 교회가 “미리엘 주교”와 같은 불쌍한 자들을 위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우리는 아히멜렉 제사장과 미리엘 주교로부터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