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앤더스 K. 젠센(Anders Kristian Jensen)

134

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이민자 앤더스 젠센은 선교로 시작하여 선교로 일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며 살았던 그의 삶이 묘비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

Greater love hath no man than this, that a man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땅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는 코넬대학과 보스톤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1927년 8월에 미국 감리교를 통하여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젠센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는 코넬대학 대학재학 중에 봉사 단원으로 크리스챤의 삶을 살면서 결단하게 되었다. 처음 한국에 와서 주로 인천 중심으로 교회개척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어두운 세상을 복음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선교적 교회의 필요성이 더욱 요구 되었다.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저술한 요하네스 블라우스가 선언한대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지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그리스도가 주 되신 교회 선교가 아니면 선교가 아니다”라고 말한대로 세상을 향한 선교의 초점을 둔 교회들을 많이 세우게 되었다. 그의 사역에는 한국의 국가적 위기에 잠시 선교를 접을 수밖에 없는 빨강불이 켜졌다. 1940년도에 일본 정부에 의해 추방을 당하게 되어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기를 기다리며 본국에 가서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선교의 지속을 위하여 후원을 호소하였다.

전쟁이 어느정도 종전이 되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울에서사역 하다가 1950년 6월 24일에 개성을 방문하던 중 개성에서 6.25이 일어났다. 피난할 여유도 없이 붙잡혀서 35개월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함께 끌려간 천주교 메리놀선교회의 패트릭 바이런 주교, 토마스 퀸란 신부, 영국 성공회회의 세실 쿠퍼 주교, 감리교의 로렌스 젤러 선교사 등 수십 명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있었다.선교사 일행은 압록강까지 끌려가며 죽음을 넘나드는 포로생활을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53년 휴전과 더불어 그 해 5월에 젠센은 석방되어 생명은 건졌지만 포로생활하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다. 당시 상황을 기록하기를 “그 행렬은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나 함께하는 끔찍한 시련이었다. 굶주림,학대 추위로 견디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함께 포로로 잡혀간 한 카톨릭신부가 (젠센)말하기를 당신과 내가 여기 있어서 기쁩니다” 라는 말을 마치고 그 신부는 죽게 되었다.

젠센 부부는 조선땅 복음을 위하여 1954년 10월 다시 내한하여 전쟁의 잿더미속에 있는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모금 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선교 사역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미국, 주한미군, 유엔군과의 협력사역을 위해서 1956년 11월 20일 미대사관에서 한국을 방문한 고문단 일행을 만나 한국 사회의 대해 설명하는 회담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과로를 이기지 못하여 심장마비로 소천하게 되었다. 젠센 선교사의 동역자인 헤리스박사는 사도 바울의 고별사를 인용하여 추모의 글을 남겼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한국을 위하여 열정으로 불태우며 헌신했던 그의 삶을 잊지 못할 것이다.(참고: 한국장로교총회 100년사, 양화진 선교사의 삶, 하나님의 선교적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