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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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초창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중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 한곳이 맥코믹 신학교(McCormic theological Seminary)이다. 1880년부터 1930년까지 맥코믹 출신 선교사 20여명을 보냈다. 특히 동시대 함께 공부했던 3명의 신학생이었던 마펫 선교사, (마삼열. S. A. Moffet), 베어드(W. M. Baird)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 (Daniel Lyman Gifford) 선교사는 맥코믹 신학교의 동기들 이었다. 동기들에 가정 먼저 한국에 들어온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는 1816년 1월9일 미주리 주에서 출생하여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1888년 12월15일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신학교 다닐때부터 선교 일정이 뜨거웠고 한국에 들어와서 교육과 전도, 조선인의 계몽을 위해 열정적으로 선교 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일본으로 건너 갔을때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사역해왔던 정동교회 (새문안교회)와 경신학당 교장을 맡아서 목회자로, 교역자로, 섬겼던 헌신된 선교사이다.

기포드는 전도의 열정이 뜨거워서 정기적으로 전도하며 매주일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 두차례에 걸쳐 전도 집회를 열어 많은 불신자들을 주께로 인도 하였다. 특히 상인들이나 백정들이등평민들을 사경회에 초청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하여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연동 교회이다. 기포드는 언더우드가 일본에서 조선땅에 돌아온 후에는 사역했던 새문안 교회를 인계 해주고 새로 세웠던 연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집중적인 사역을 하게 된다. 2년후 1896년에는 자신의 사택을 개조하여 연동교회를 확장하여 세우고 헌당식을 갖게 된다. 당시에 서울에서 가장많이 모이는 교회로 급성장하게 된다.

1890년에는 정동 여학당 (정신 여학교의 전신)의 2대 학장이었던 헤이든 기포드와 (Mary Hayden Gifford) 결혼하게 된다. 그녀도 남편, 다니엘 기포드와 같은해 1888년 9월 29일에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신 여 학당장과 여성 선교사역으로 경기 지방과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한국에 왔고, 결혼한 후에도 어떠한 선교 활동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895년에 54곡의 찬송가집을 처음 출판하고, 1898년에는 83곡을, 1900년에는 87곡의 제3판을, G. 리와 공동 출판하였다. 그리고 장로회 선교 본부로부터 최초의 공인 찬송으로 채택되어 장로교단 모두가 사용하게 되었다.

다니엘 L. 기포드 부부는 평소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선교잡지 <The Korean Repository>에 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 하였다. 특히 그는 선교를 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담담하면서 세밀하게 그려 <조선의 풍속과 선교(Everyday Life in Korea)>라는 책으로 펴냈다. 또한 ‘죠션 셩교서회’ 창립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 하였다. 그러나 안따깝게도 시흥, 김포, 안성 등 경기도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선교에 정열적으로 헌신하던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는 결국 선교 여행 중 이질에 걸려 1900년 4월 10일 39세를 일기로 소천하게 되었다. 동기중에 제일먼저 한국에 왔고 제일먼저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 한달후 그의 부인 헤이든 선교사도 43세의 나이에 결국 전염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후 기포드 어머니는 아들 다니엘과, 며느리 헤이든이 별세한 뒤에도 조선의 가난하고 병든자를 구제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혹독한때, 이름도 빛도 없이 전염병과 싸우며 생명 복음을 전했던 다니엘 기포드 가정의 숭고한 선교 정신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참고문헌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양화진 선교사의 삶, 이 땅에 묻히리라 한국 개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