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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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유진벨 선교사 가족사진 -유진벨,로티벨,헨리,샬롯떼

로티벨 (Lottie Ingram Witherspoon,Bell) 선교사는 1867년 5월15일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태어났다. 목회자이며 학자이신 아버지 영향을 받고 신앙으로 성장 하면서 한국 선교의 비젼을 품고 신학교를 막 졸업한 유진벨(Eugene Bell)과 1894년 6월26일에 결혼하여 1895년 4월7일에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을 받았다. 남편 유진벨(Eugene Bell)은 이미 신학교를 졸업 이전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고 그의 아내  로티벨(Lottie W. B.)은 자신이 공부했던 신학교 은사의 딸이기도 하다. 그들 부부는 선교사로 서울에서 언어 공부와 현지 적응을 하고 나주 지역에 선교지부를 세우기 위하여 내려 갔지만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나주지역 선교를 유보하고 목포로 가서 선교지부를 개척하게 되었다.

목포에 교회가 조직되고 세례와 학습 신자들이 늘어가는 급성장을 이루게 된다. 초가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리다가 1898년 5월 15일 입당 예배를 드렸다. 낯선 이방땅에 와서 지역민들과 가까이 하기 위해서 매월 15일에는 자신의 집을 개방 하였다. 후에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합류로 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런 가운데 유진벨 선교사는 목포를 떠나 가족을 두고 전주까지 순회 전도 여행을 한다. 부인 로티벨 선교사는 아내로, 엄마로, 선교사로 일인 다역을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로티벨은 (Lottie W. B.)은 딸 샬롯(Charlotte)을 낳은지 2년 되던 해에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풍토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1901년 4월12일에 운명하게 된다.

전도 여행을 떠났던 남편 유진 벨은 아내 임종을 보지 못하고 수일이 지나서 목포에 도착하게 되었다. 두 어린 자녀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엄마의 임종을 지켜 보아야만 했다. 로티는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34세로 5살의 아들과 2살의 딸을 두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로티벨은 28세에 조선에 와서 34세라는 짧은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편지속에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으나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라고 고백 하였다.

로티 벨은 남 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제일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후에 남편 유진 벨도 1922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 교수와 여러 사역속에 과로로 건강이 악화 되면서 57세에 별세 하였다. 이들의 선교 사역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로티 벨 선교사의 둘째 자녀인 샬롯 위더스푼 벨이 윌리암 린튼과 결혼하여 1912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하여 부모의 뒤를 이어서 군산에서 교육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광주,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유진 벨의 가문의 헌신과 사랑은 한국 강산을 영적 옥토로 만들어내는 큰 밑걸음이 되었고 오늘날 구원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게 하였다. 우리 민족은 복음의 빚진자로 세계 선교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참고도서 :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선교, 한국선교 이야기, 호남선교 초기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