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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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조세핀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한국 사회를 교육을 통하여 여성운동을 펼쳤던 조세핀 페인은 (Paine, Josephine Ophelia) 1869년 2월21일, 보스턴에서 태어나서 교육 과정을 마치고 직장생활 하던중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믿음의 첫걸음을 걷게 되었다. 그때가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로 하나님앞에 전 생애를 그리스도에게 바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열정적인 교회봉사와 빈민가 봉사사역등 선교사로의 준비를 하기 위하여 보스턴 여집사 훈련학교에 교육을 받고 1891년 11월에 미국 감리회 여성 해외 선교회 뉴잉글랜드 지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23세가 되는 1892년 9월18일에 한국에 내한하여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들이 배우는것을 차단 당하는 시기였다. 여자가 많은것을 알면 복이 적어진다고 하여 사대부 부녀들 외에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배우지 못해서 문맹이었다. 페인은 먼저 여성 문맹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이화학당이 생긴지 6년이 되었을때 페인이 이화에 근무 하면서 영어와 성경만 가르쳤던 교과 과정을 확대하여 한글,수학,역사,지리,과학을 가르치고, 체육 과목을 최초로 신설하게 되었다. 체육 과목은 당시 분위기에 수용할수 없었다. 그 이유는 얌전한 몸가짐을 갖추는것이 미덕으로 생각 하는데 몸을 흔들어 대고 뛰는 운동은 그시대 대단한 충격적이었다. 양반층에서는 가문의 치욕이고 혼삿길 막힌다 하여 반발하며 학당에 보내지 않는자들도 있었다.

페인은 어려운 시기에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하여 학과 과목에 재봉과 재수를 가르쳤으며 최초로동역자와 함께 인체의 기능과 위생에 관한 생리학 과목을 만들어 쉽게 이해 하도록 문답식으로 교육시켰다. 페인은 뛰어난 행정 능력과 경영 방법으로 학교운영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발전 시켰다.

그녀는 교사중 가장 연소자였지만 이화 학생들은 그녀를 아버지라고 부를만큼 진지하고 마음 따뜻한 아버지 같은 인상을 갖춘자였다. 교육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했던 이학학당도 열강들의 세력 다툼으로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학교를 잠시 폐쇄하는 아픔이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 되었을때는 신앙을 통한 기도회로 민족운동을 지원하며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일시 중단하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주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그녀의 선교 편지에 의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진지하고 겸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실것을 믿습니다”라고 적었다.

고종 황제는 교육체계 현대화를 위해 칙령을 공포 했는데 이칙령에 따라 이화 학당은 초등 학교부터 대학 과정까지 설치되어 교육 과정을 지속적으로 받을수가 있었다. 갑자기 학생들이 증가 하면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하여 교실을 확충하는것이 큰 과제였지만 탁월한 페인 선교사의 계획대로 미국 여러곳에서 후원을 받아 새건물로 확장하게 된다. 건물 양식도 서양식으로 세워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며 학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학생들이 와서 좋은 환경속에 질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페인은 1893년에 제3대 이화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간 여성교육에 이바지하고 마지막 인생을 열악한곳에 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제물포와 해주지역에 선교사로 전념 하다가 콜레라로 1909년 9월25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임종 직전에 남긴말은 “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으며 헌신으로 조선의 백성을 섬겼던 조세핀 페인 선교사의 사랑은 늘 우리 마음에 영원히 기억 될것이다.(참고도서 : 이화 100년사, 양화진 선교사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