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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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달젤 A. 벙커 (Dalziel A. Bunker) 선교사는 최초라는 수식어들이 많다. 최초의 근대학교 육영 교사와 배재학당 당장으로 봉직 하였고 한국 최초로 교도소 선교를 시작 했으며 최초로 애국가를 보급 하였다. 그는 1853년 8월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베린 대학(Oberlin College)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1882년 4월 한미수호 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의 근대식 교육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한국 정부에서 최초로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Royal College)을 개교 하였다. 벙커는 미국 정부의 추천과 고종 황제의 초청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86년 7월 4일 입국하여 교수직을 맡아 근대 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다. 이듬해(1887) 벙커는 의료 선교사인 엘러스와 결혼 하고, 현재의 대한 기독교 서회의 전.신인 조선 한국 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의 창립 위원으로 활동 하였다. 육영 공원이 폐쇄되는 8년동안 고관 자제들과 현직 고급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황제가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때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고종 황제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그후 아펜젤러가 순직한 이후 배제학당에 2대 교장이 되었다. 배제학당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구습에 사로잡힌 한국인을 무지에서 해방시키고 근대 문명의 지식을 주고 과학을 이해 하도록 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일군을 키워내는 중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외에도 벙커는 청년운동, 민족운동, 교회 연합운동에 깊이 개입 하였으며 민주 운동에 중추 세력으로 등장 하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때로는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후에 많은 지식인들이 투옥 되었을때 그들을 위한 석방 운동을 펼치며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와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야만적인 고문제도 폐지. 독서의 자유등 인권보호를 건의하며 성경을 비롯하여 기독교 관련된 서적과, 과학,철학,역사 등 많은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는데 이때 백범 김구 선생도 이곳에서 장서를 읽었다고 한다.   감옥에서 벙커 선교사를 통하여 변화된 이야기를 들을수 있다.

“방목사와 그의 부인이 정규적으로 방문한 그들의 감옥은 처음에는 탐구의 방이었다가 기도의집이 되었고 나중에는 예배를 드리는곳이 되었으며 이것이 마무리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감옥 밖으로 내보셨고 일하도록 하셨다.”

이상재등 민족 지도자들이 옥중에서 1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펜젤러 선교사 순직후 배재학당과 장동제일교회, 동대문교회를 맡아 선교 사역을 하면서 교파를 초월하여 각 교파 선교사들 연합회 기구를 조직하여 성서 보급에 총력을 다하였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896년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 곡에 맞춰 학생들을 가르쳐 부르게 하는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보급 하였다. 그의 선교적 삶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일생을 한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살다가 1932년 11월28일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서 별세하여 그의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 되었다. 당시 초교파 기독교 기독신보에 의하면 “그는 복음선교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조선 교회나 사회에 유력히 활동 하는자들이 그 교문으로부터 나왔고 그의 목회와 선교사업을 통해 동대문 바깥 13곳에 교회 개척이 모두 이루어 졌노라” 소개한다.(참고: 양화진 선교사의 삶/내한선교사 총람, 양화진 선교사열전/기독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