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앙: 세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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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횃불트리니티 총장 어시스턴트/횃불재단 DMIN 스태프)

세례 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실제로 구원이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다면 세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례를 받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가? 세례를 받지 못한 자는 지옥에 가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가? 세례의 유익이란 무엇인가?

세례는 성찬과 함께 은혜의 방편에 해당한다.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를 말한다. 하나님은 아무런 통로 없이 성령을 통하여 직접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 예를 들어, 배 속에 있는 태아나 유아 그리고 지적장애인 같은 사람의 경우, 하나님이 선택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로 마음을 먹으면 언어로 된 말씀 사역 없이 곧바로 성령을 통하여 이들을 거듭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은혜의 방편을 사용한다. 총 세 가지의 은혜의 방편이 있다. 말씀, 기도, 그리고 성례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말씀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 반면 세례는 모든 사람이 아닌,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베푼다. 기도는 은혜의 방편 중에서 능동적이다. 말씀과 세례는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지만, 기도는 자신이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능동적이다.

결국, 세례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사실만 제대로 이해하면 세례와 구원과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말씀을 예로 들면, 말씀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자동으로 구원 받지 않는다. 성령께서 내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가능하다. 그런데도 말씀이 은혜의 방편으로써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데 쓰는 도구이니까,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례 자체가 자동으로 구원을 성취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내적으로 거듭나게 하셔야 가능하다. 그런데도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죄이듯이 세례를 받지 않는 것도 역시 죄다. 이점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8장 5항에서 설명한다. “비록 이 규례를 멸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이 큰 죄이지만, 은혜와 구원이 그것에 분리될 수 없이 결합하여서 누구든지 그것 없이는 중생하거나 구원받을 수 없다든지 혹은 세례받은 모든 사람이 확실히 중생했다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효력은 무엇인가?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집행되는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이 규례의 바른 사용에 의해 그 약속된 은혜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자기 뜻의 계획에 따라 (어른이든 어린아이든지 간에) 그 은혜가 속한 자에게 제공될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실제로 나타나고 주어진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8장 6항). 세례의 효력은 세례가 집행되는 그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에만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 아무런 반응 없이 그것을 무시했지만,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푸셨을 때 과거에 들었던 말씀이 뒤늦게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찬가지로 은혜의 방편은 세례받는 순간만이 아닌,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방법에 따라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유아세례를 인정한다. 유아가 세례를 받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세례의 효력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방법에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한 번 받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보더라도 한 번만 발생하는 것이 있고 여러 번 발생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출생과 사망은 한번 일어난다. 결혼식은 한 번 하지만, 결혼기념일은 매년 반복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방편도 자주 해야 하는 것이 있고, 가끔씩 해야 하는 것이 있으며, 일생에 딱 한 번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가장 자주 해야 하는 은혜의 방편은 언어로 된 말씀이다. 성찬도 자주 해야 한다. 그러나 세례는 일생에 딱 한 번 한다. 이는 세례가 의미하는 것을 잘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