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두표/시카고문인회
소(牛)를 마주하고, 거문고(玄鶴琴; 현학금)를 타다. 의 글자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참된 도리(道理)를 말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중국에서 사용하는 말이고 우리는 비슷한 말로 ‘우이독경’(牛耳讀經)(쇠귀에 경(經)읽기)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경전(經典)을 읽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대등한, ‘대우탄금’(對牛彈琴)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후한(後漢)말 양(梁)나라 때의 승려인 우(祐)가 편찬한 홍명집(弘明集) 이혹론(理惑論)에 나오는 이야기로, ‘彈琴’(탄금)이란 ‘거문고를 연주한다.’의 뜻입니다. 즉 소(牛)에게 거문고를 연주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듯,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깊은 이치를 말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아무 소용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당시 <모융>(牟融)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불경(佛經)에 밝아 많은 사람들이 불경을 배우러 그를 찾아오자, 그는 유학자(儒學者)들에게 불교를 설명할 때는 불전(佛典)이 아니라 유학의 경전(經典)을 인용하였다. 도(道)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에게 펴는 것이요, 분별(分別)함은 사물을 아는 자에게 통하는 것이요, 글은 총명한 사람에게 전할 수 있고, 일을 꾸밈은 명석한 사람이 할 수 있는데, 내가 그대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말을 인용하는 것이요. 만약에 불경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 요체(要諦)를 알 수 없을 것이요. 비유(比喩)하자면, 눈먼 소경에게 여러 가지 색깔을 말해주고, 귀머거리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요. <사광>(師曠)의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줄 없는 거문고로 소리를 낼 수 없으며, 담비 털옷이 따뜻하다고는 하나, 죽은 자를 따뜻하게는 못하는 법이오. 그래서 노(魯)나라의 어진 사람 <공명의>(公明儀)가 하루는 소에게 거문고를 켜주었다. 그런데 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풀만 뜯어먹고 있었다. 소가 듣지 못함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오. 이번에는 모기와 등에의 울음소리와, 젖을 먹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들려주었더니 소는 꼬리를 흔들면서 발굽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고 귀를 세우고 소리를 다소곳이 들었고 귀를 세운 체 거문고 소리도 들었다오. 이는 소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이오. 이처럼 내가 당신들에게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학자 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모융>의 말에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장자(莊子)는 경상초(庚桑楚)의 어록(語錄)에서 ‘兒子動不知所爲, 行不知所之.’(아자동부지소위 해도, 행부지소지 니라.) 즉 어린아이는 몸을 움직여도 무슨 짓을 하겠다는 것을 모르고, 걸으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의뜻입니다.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 아직 인지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장자 외편 <변무>(騈拇)의 어록(語錄)에서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시고부경수단 이나, 속지즉우, 학경수장 이면 단지즉비 라.)즉 물오리(鳧)는 다리가 비록 짧지만, 길게 해준다면 괴로워하고, 학(鶴)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준다면, 슬퍼할 것이다. 의뜻입니다. 그러면서 <장자>는 소는 그냥 소다. 왜 인간의 거문고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그러면 인간은 소가 하는 소리를 알아듣는가? 그것이 모두 인간의 용심(用心)이다. 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