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풀이] 錦衣還鄕(금의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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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그대로 직역(直譯)하면,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 의뜻으로 ‘성공한 후에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온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말의 유래는 초한지(楚漢志), 혹은 초한연의(楚漢演義)라고 불리는 중국역사소설에 등장하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일화(逸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전쟁 중일 때 유방(劉邦)이 진(秦)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을 먼저 손에 넣었는데, 이러한 때, 항우(項羽)도 뒤늦게 제후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가, 유방이 이미 함양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함곡관 가까운 신안(新安)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진(秦)나라 하남성(河南省) 영보현(靈寶縣) 서남쪽에 설치한 관성(關城)으로 양쪽이 험준한 절벽으로 솟아있는 계곡에 있으며 천연적으로 험준(險峻)하여 마치 함(函)처럼 되어있어 ‘함곡관’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를 통과하지 않고는 함양으로 들어갈 수 없는 군사요충지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40만의 대군을 거느린 항우는 유방의 10만의 군사를 힘으로 밀어붙이고 함양으로 밀고 들어왔는데 항우의 모신(謀臣)인 범증(范增)은 그를 도와 제후의 패자(覇者) 가 되게 하였는데, 적수인 패공(沛公=劉邦)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범증을 의심하여 직권을 빼앗으므로 그는 항우를 버리고 팽성(彭城)으로 가서 죽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유방의 참모인 번쾌(樊噲)는 꾀를 내 항우에게 변(辨)하기를 ‘전에 초(楚)나라 회왕(懷王)께서는 여러 장수에게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관중(關中)을 맨 먼저 평정한자를 관중의 왕(王)에 봉하리라. 그런데 당시에 진나라 군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며, 또 집요하게 반란군을 추격해오는 바람에 장수들은 관중 돌격선두에 나서기를 모두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먼저 함양(咸陽)에 입성한 것은 패공입니다. 하지만 패공은 진나라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궁전을 수비하는 조처만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패상(沛上)으로 후퇴시켜 대왕(항우)께서 당도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함곡관의 수비를 굳게 한 것은 또한 도적의 침입과 비상사태에 대비함이었을 뿐입니다.’이렇게 말하자 항우는 기분이 좋아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때 슬며시 빠져나와 동쪽으로 도망을 쳤다. 항우는 원래 초나라 사람으로 자신을 서초패왕(西楚覇王) 이라 칭하고,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랑을 하고 싶어 했다. 그때 관중사람이 이렇게 충고를 했다. ‘관중은 중원(中原)의 열배나 되는 부(富)를 지니고 있고, 지형도 험준하여 요충지이고 토지도 비옥함으로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는 것이 천하를 호령하기에 다시없는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인간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헛수고야.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금의(錦衣)를 걸쳤으면, 환향(還鄕)을 해야지, 금의를 걸치고도 깜깜한 어둠속을 거닌들 무슨 소용인가? 이는 마치 비단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어둠속을 거니는 금의야행(錦衣夜行)과도 같은 것이야.’ 여기서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는데, 인간은 조금 잘 나가거나 출세를 하면, 곧바로 우쭐합니다. 그 우쭐 함 속에 몰락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항우가 고향으로 가 관중을 비운 것을 알고 장량(張良)과 소하(蕭何)의 건의로, 한신(韓信)으로 하여금 항우를 격퇴시키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