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변화 되어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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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변화란 달라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까.? 그러나 변화란 쉽지가 않은 것이기도 하며, 사실은 어려운 것이다. 이미 습관화된 자기것을 바꾸지 못하는 것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은 그것으로 인한 병이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변화의 혜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실천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에는 문제가 없을거라고들 착각을 한다. 자신이 하는 행위 즉, 자신의 자아만큼은 옳바르다고 자기도취를 해 버린다. 어릴때 만들어진 자아위에 자기의 인격을 올려 놓고는 그것으로 완성된 인간인 양 허세를 부리며 사는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구나 받아 들여야 할 변화를 무모하리만치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습관이 있다. 주치의가 30분씩 걸으라는 말을 듣다 말다 하기를 몇십년을 하나 보니, 내 속에 숨어 있는 박약한 의지력이 나를 놓아 주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내 속에 나는 내 말만 믿지 타인의 말은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 고집도 존재를 한다. 즉 변화 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나에게 손해 임을 알면서도 그리 하고 있다. 이것은 나 만의 문제는 아닌 상 싶다. 이러한 일들은 육신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세계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바로 잡아 주려고 노력하는 종교에 귀속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얼마전에 술먹은 중이 절에 불을 지른 일이 한국에서 있었다. 또한 목회자들의 탈선(?)도 그 동안 많이 들어 왔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주체에서 사회 도덕적인 주체로 변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 난 일들로 보아야 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차이를 모르는 우둔한 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싶다. 변화에 성공을 했거나 못했거나의 차이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종교를 갖게 될 운명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제한된 존재라는 거다. 인간은 서로의 무게는 달라도 애처로운 고통을 받으며, 늙으면 죽어야 한다. 이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종교는 우리 옆에 존재를 한다. 인간이 거머쥐게 될 종교의 궁국적 결말 또한 인간은 알지 못한다. 종교 속에 평등이 있다고는 장담치 못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다름이라는게 어느 종교에서나 존재 하는 듯 하다. 그 속에서 다들 같다고 주장을 하지만 이것은 소수가 즐기려는 하나의 수단적인 방법일 뿐이다. 종교의 끝은 개개인의 것이다. 단체로 묶여지게 되는 순간 그것은 사이비 종교가 될 확룰이 크다. 어리석음도 변화되면, 그 틈새로 행복이 찾아 온다. 그러나 이때 찾아 오는 행복을 잡는 사람은 극소수에 달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걷는 것 같이 미래를 못 보게 된다.
변화하고 싶지만, 결과에 대한 갈등이 생기게 된다. 이 갈등이 곧 두려움인 거다. 두려움의 반대편에는 희망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변화라는 것은 혼란과 혼돈이 수반되며, 내면적인 두려움도 생긴다. 그냥 이대로 안주하는 것만이 최상인듯하나, 파도치는 듯한 우리의 인생은 갈등이라는 사회적 부산물을 늘 끼고 살아야 한다. 내가 끼고 있는 좋지 못한 부산물들을 종교가 조금 덜어가기에 인간이 종교를 갖게 되는게 아닐까 한다.
“나는 변화를 원하는가.?“ 이런 질문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변해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만이 진정한 질문이다.
어제 보다는 오늘 다른 변화를 추구하고, 발견하는 자신 만이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이며, 인격자가 아닐런지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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