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독립운동 흔적 182곳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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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1세대들이 1904년 초반 해외에 최초로 세운 것으로 알려진 하와이주 호놀룰루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 세워진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한 YTV 아메리카 김관호 사장 겸 디렉터.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0년대 중반 무렵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상항 연합감리교회.

오늘 8.15 광복절 74주년

LA 방송인 김관호씨, 캘리포니아·하와이·멕시코 등

“미국 동서부와 멕시코, 쿠바 등 북미 182곳을 탐방하며 1900년대 초반과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북미 전역 독립운동의 숨결을 찾아다녔습니다.”

LA에서 활동하는 방송인인 ‘YTV 아메리카’ 김관호(미국명 존 김) 사장 겸 디렉터는 지난 5월부터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뉴욕, 롱아일랜드, 덴버, 시카고, 네브래스카주 등을 쉴 새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은 멕시코시티와 유카탄주 메리다시 에네켄(애니깽)의 흔적을 찾았다. 1905년 조국을 잃고 멕시코 선인장 농장으로 이주한 한인 1세대는 고국을 잊지 못하고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을 기꺼이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쿠바에도 10곳이나 한인 1세대들이 일했던 농장이 남아있다.

미 본토 118곳과 하와이 22곳, 멕시코와 쿠바를 모두 더한 독립운동 유적지는 총 182곳에 달한다. 이 가운데 142곳은 독립기념관에 수록된 독립유적지와 일치한다. 김 사장은 지난 1998년부터 20년 넘게 사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여정에 올랐다.

중심은 역시 샌프란시스코였다. 당시 ‘상항’으로 불리던 샌프란시스코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해 서재필 선생과 재미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었다. 또 한인 1세대는 1903년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갤릭호를 타고 일본,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하와이 호놀룰루에는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한인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아직 남아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안창호 선생이 설립자로 등재된 상항 연합감리교회가 건재하다. 현재 주소는 ‘3030 주다 스트리트(Judah St), 샌프란시스코(SF), 캘리포니아(CA)’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제출된 안창호 선생의 당시 미국 입국 비자도 공개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잃은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오던 비자에 국적으로 중국을 기재했다. 당시 비자를 자세히 보면 ‘FORM OF CHINESE CERTICATE'(중국 국적 증명서)라고 쓰여 있고 안창호 선생은 한자로 ‘安昌浩’를 쓰지만, 비자에는 ‘安彰昊’로 사인을 했다.

1900년대 서부는 일본인의 늘어가는 토지 소유에 반감으로 반일 정서가 높았던 시기였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까지 서부의 반일 감정은 더욱 격해졌다. 그해 3∼4월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등 이 지역 신문들은 한국 르포 기사로 1면 통단을 할애한 3·1운동 대서특필 기사를 싣기도 했다. 대일여론전의 포문을 연 기사였다. 3·1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3월 9일.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상하이에서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3·1운동 소식을 알렸다. 안창호는 정한경과 서재필에게 타전하였다. 오후 7시 30분 중앙총회협의회를 옥스트리트 한인교회에 소집하니, 재류동포 남녀노유(노소) 전체가 미친 듯 만세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눈물을 뿌리는 자가 많더라.”

김관호 사장은 “둘러본 독립유적지 가운데 교회는 남아있는 곳이 있지만 나머지 유적은 빈터이거나 일반주택, 민간건물 등으로 바뀌었다. 이미 100년을 훨씬 넘거나 이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번상으로는 도저히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사료와 대조해 가까스로 현장을 담을 수 있었다. 촬영을 통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서재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부두노동자로 하역일을 했다. 이어 필라델피아에서 의대 공부를 했고, 의사가 되면서 한국 최초의 미 시민권자 1호가 되기도 했다.

김 사장은 유적지 탐방 과정의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중부 캘리포니아 다뉴바지역 리들리, 프레즈노, 베이커스필드 등은 지금은 한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 전원지역이다. 하지만,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한인 이민 1세들이 고된 농장 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어 독립자금을 모은 곳으로 유명하다. 리들리의 김앤드송(KIm & Song) 위탁판매소는 농산물 도매상이었다. 도산 선생이 리버사이드에 세운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캠프와 비슷한 형태였다. 최근 김 사장이 찾아간 김앤드송 위탁판매소는 주택으로 바뀌었다. 그곳 주택 앞마당에 무궁화가 피어있었다고 김 사장은 전했다. 집주인은 아마도 1910년대나 1920년대 초에 심어진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이름으로 김용중과 송철이란 한인이 이곳에서 위탁판매소를 운영하며 모은 돈을 독립자금으로 보냈다는 사료가 일부 남아있다. 김관호 사장은 “무궁화를 본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더라. 약 100년 전 이곳에 독립을 위해 애쓴 미주 한인들이 있었구나라고 돌아봤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중부 다뉴바 공동묘지에서는 한인들의 묘비가 70기 넘게 발견됐다. 영문으로 KIM을 쓴 사람도 있고, K.H.SHIN(1873~1941)은 ‘BORN IN KOREA'(한국에서 태어났고), ‘흥사단우’라고 비교적 또렷하게 한글로 표기돼 있었다. 1910년대 운영됐던 북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북쪽에 있던 윌로즈 비행학교 자리도 탐방 대상이 됐다. 당시 이 비행장은 조국을 잃었지만 우리 힘으로 전투비행사를 양성해 일제에 맞서려던 당시의 눈물겨운 노력의 하나였다.

동부에서도 독립운동의 숨결은 느껴졌다. 3·1운동의 모태가 된 2·8 동경 독립선언에 영향을 준 단체는 뉴욕 신한회였다. 1917년 10월 뉴욕 한인 김헌식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대표자를 파견하고자 제안했다는 기사가 당시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실렸다. 당시 신한회 12개항 독립청원서에는 “탐욕 때문에 약한 이웃나라를 파멸시키는 제국주의는 연합국의 승리로 파괴되었다. 미국정부와 연합국은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대원칙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여성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1919년 8월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됐다. 새크라멘토 한인 부인회, 다뉴바 신한부인회, LA의 부인친애회,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 등이 모였다. 재미한인이주사 연구학자인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는 “3·1운동 이후 대한여자애국단을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여성들의 활동이 눈에 띄었다”라고 말했다.

YTV 아메리카는 이런 북미 지역 독립운동 유적지와 스토리를 담은 3·1운동, 임정 100주년 및 광복 74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3부작 ‘미국에 남아있는 3·1운동의 흔적을 찾아서’를 15일, 22일, 29일 방영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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