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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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지금의 세상은 효(孝)의 규범이 너무나 약해져 있다.  효라 함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정확히 표현을 하면,  효도(filial piety)란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道理)이며,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을 뜻한다.  ‘孝’ (효) 라는 한자는 아들이 노인을 업고 있는 모양의 글자다.  효의 개념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첫번째 행동 양식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는 가족간의 더 없이 훌륭한 덕목 임을 누구나가 인정을 한다. 그러나 이민 온 지금의 노년들은 과연 자식에게 업힐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노년의 자립이란 스스로가 돌보는 Self Care 이다.

요즈음 시대에는 효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사라지다 싶이 되었다. 지금의 노년 들이 어린 시절에는 수 없이 많은 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노년들의 어린 시절을 말 타고 다니는 시대라 한다면, 지금은 광속의 속도를 지닌 컴퓨터를 손에 들고 사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효도를 이야기하기에는 효의 본질의 속도가 너무 느려 보인다. 아주 오래 전 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효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으며, 율법들도 많다.  효라는 것은 모든 문화권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치부를 한다. 유교에서는 효를 통해 예(禮)까지를 요구한다. 유교를 충효사상이라고도 하나, 기본적인 가치는 “ 효 “ 이다.

서양으로 가면, 유대교나 기독교에선 효의 중요성을 십계명에서 볼 수가 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언급한후에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지키라는 율법 중에 “ 부모를 공경하라 “ 가 으뜸으로 나온다. 성경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기재 되어 있다.  유명한 철학자들은 효도란 제약이나, 조건 없이 행해야 한다고 평가를 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자식들로 부터 효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이해하는 효는 항상 대가족 제도 속에서 쉽게 보여 지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핵가족이거나 자녀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작금의 실태로는 효에 대한 이해도 많이 결여 되어 있다.

한국문화속에 녹아 있는 유교사상의 효는 공자로부터 출발을 한다. 공자는 효의 본질은 공경심이라고  강조 했다.  모든게 부모에게 향한게 공자의 주장이다. 맹자는 대효(大孝)를 주장 함으로서 효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 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효를 배경으로 성장한 지금의 노년들은 과연 이런것을 자식들에게 전수시킬 만큼 여유로움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고령화 시대의 밝은 면만 보면 참으로 그럴듯하게 좋게 보인다. 장수한다는게 인생의 아름다운 결과물로 보여진다. 그러나 많은 고령자 입장에서 보면 “ 살아 있는 거지,  사는게 아닌 “ 현실에 놓인 분들도 많다.  대가족제도 붕괴와 핵가족 제도의 발달 이면에 효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노인이라하여 보호받고,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 스스로 복지도 창출하고, 좀더 생산적인 노인은 될수가 없을까?.

노년 스스로가 해결 할 수 있는 덕목은 무엇일까.  노인이라해도 도움을 주고  베푸는 삶을 살수가 있다. 100세 시대의 노인들도 있는 힘을 다해서 꽃 처럼 아름답게 다시 피어 날 수가 있다.  진정으로 겸손하여 짐으로 해서 어느 누구에게 든지 향기를 내 뿜을 수가 있다. 누구에게 든지 격려하고, 배려 함으로 해서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가 있다. 매사에 감사함을 주변에 보여 준다. 그러면 그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혼자 있게 될 경우에는 자연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풀 한포기라도 매일 같이 대화를 해 보면, 마음은 한 없이 평안 해 질 것이다. 주변의 자연과 친숙해지는 것도 자기 돌봄 ( Self Care ) 의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덧붙여 표현 하자면,  고립을 방지하려면 지속적인 교류가 중요하다.  즉, 많은 사람과 주변의 자연과도  알고 지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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