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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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담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장 광야로 가셔서 40주야를 금식하신 뒤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신 후 주님 공생애의 첫 공식 설교(마태복음 5장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인 산상 수훈에서 하신 말씀 중 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먼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고 전제하신 후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못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렵고 심각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의는 보통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정말 바리새인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율법에 철두철미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유대사회에서 남다른 의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두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또 율법에 근거해 필요한 율례를 만들었고, 율법을 척도로 사람을 구분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한 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생활에 대단히 철저했습니다. 마당 귀퉁이에 심은 소채에서도 십일조를 떼어 바쳤습니다. 철저히 안식일을 성수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에 철저한 사람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대체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적, 곧 형식적이고 문자적인 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문자로 기록 된 율법만 범하지 않으면, 형식만 범하지 않으면 그 속은 어떻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곧 속은 냄새 나는 썩은 시체가 들어있지만, 그 겉만 회를 칠해 깨끗한 모습을 한 것과 같다며 주님이 고발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신, 본질을 구현해야 하는데 그들은 형식에만 연연했습니다. 위선적인 의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말하는 살인은 실제 칼이나 도구 등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마음 속은 상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움과 증오심으로 들끓지만 사람을 실제로 상해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적인 의는, 형식이나 문자적인 것이 아닌 율법의 정신이었고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마음의 중심이 어떤 것이냐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살인이라는 것이 미움 혹은 증오와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의’는 반드시 행위로 살인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이미 살인죄를 범했다고 말씀합니다. 형식이나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동기와 과정,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의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서 본질적인 의를 추구해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에 나오는 간음에 관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으로는 실제 행위로 간음을 범하지 않았으면 그 마음 속 중심이야 어떻든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의’의 잣대는 실제 행위는 없었으나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위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마음에 동기와 과정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의의 잣대입니다.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판단하는 것과 주님이 판단하는 것이 다릅니다. 중심이 문제입니다. 동기가 문제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 주님의 이 말씀은 실제 몸의 지체를 잘라내라는 것이 아니고, 동기를 문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음욕을 품는 마음, 이웃의 물건을 탐하는 마음, 이웃을 증오하는 마음, 그 동기를 잘라내고 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주문이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율법이나 형식을 추구하지 말고 율법의 정신, 본질을 추구하여. ‘율법적 의’가 아닌 ‘복음적 의’를 추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