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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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TV 토론회에서 가끔 기독교 인사들이 패널로 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이리 가볍고 얕은가?’ 이다. 성경 외에는 인용할 자료가 없고, 때로는 성경의 인용도 잘못 하기가 일쑤다. 기독교 성직자로서 그들의 천박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참으로 불편하다. 그러나 더 불편한 사실은 그 가볍고 얕은 생각이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생활 또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어려워서는 안 될 것이고, 무슨 철학자나 형이상학에 통달한 사람들이나 몸을 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순하고 명쾌한 영적 지혜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 종교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몸소 삶으로 실천하여 보여준 성인(聖人)의 삶을 좇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종교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것은 맞다. 그러나 가볍고 얕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삶을 살았다. 성경에는 그 12명의 제자를 예수가 직접 찾아가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베드로의 소명 사건(召命, Calling)은 특별한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예수와 베드로가 처음으로 만나는 이야기는 이렇다. 예수가 사람들을 모아, 바닷가에 가서 말씀을 전한다. 말씀을 마치고 예수가 베드로에게 다가가 그에게 명령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가 밤새 그곳에 그물을 내렸지만, 고기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물을 내리니, 엄청난 고기들이 잡혀서 옆에 있는 배들이 도와주어야 할 정도가 된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의 영적인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자신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한 예수가 메시야(구원자)임을 깨닫고 그 앞으로 간다. 그리곤 자신으로부터 떠나달라고 말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제게 기대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저를 떠나십시오”(눅5:8)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다시 명령한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이제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되게 하리라.”(막 1:17)

 

짧은 이야기이지만, 예수는 베드로의 심적 상태를 뒤집어 놓을 정도의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베드로에게 명령했던 예수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여기서 “깊은 곳”은 결코 물리적, 수치적 깊은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내면과 영혼 깊은 곳을 말하는 것이다. 얕고 가벼운 삶 속에서 깊고 무거운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말이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아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많이 잡은 ‘가벼운” 기적에 놀라서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발견하지 못했던 인간 본성의 죄성과 거대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 하염없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한계, 그리고 끊임없이 복제하고 또 복제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만을 생존시키고자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이기심을 예수의 그 한 마디에 깨닫게 된 것이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참으로 가벼워진 세상이다. 대중 매체는 가볍다 못해 휘발성에 가까운 문화 컨텐츠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게 만들고 있다. 정치도, 종교도 가볍고 얕아지고 있다. 경제마저도 “너희 때문에 우리가 더 못 먹어”라는 식의 일차원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더 복잡하고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깊게 생각하고 무겁게 삶을 살아라, 그 때 비로서 단순하고 분명한 세상을 만들어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다”라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을 발견해야 한다. 지금보다 깊고 진지하지 않는다면, 얕고 가벼움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바로 이 시대를 향한 예수의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