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버킷리스트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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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명(시카고신학대 교수)

유행이라는 게 무섭다. 분명 버킷리스트(Bucket List)란 말을 어디서 듣고 몇 번 흘려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 그 단어가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어떤 문화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정확한 어원을 찾아본 적이 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란 의미로 쓰였지만, 그게 ‘버킷리스트’란 단어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호했다. 죽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Kick the Bucket’이 있었고, 그 말은 옛날 교수형을 집행할 때 빈 버킷(통) 위에 사람을 매달고 버킷을 차버린 것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마저도 명확하지 않다. 버킷이 왜 죽음을 떠올리는 단어가 되었는지 모호한 상태에서 유력한 인터넷 사전을 뒤져 버킷리스트를 찾았더니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건 놀랍게도 2006년이었다.

‘버킷리스트’가 그 짧은 시간에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용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무의식 중 필요로 느꼈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다루는 용어를 제공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계화 시대의 문화현상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그 현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버킷리스트를 단순히 재미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고 또 그 내용이 사람마다 많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 담긴 죽음의 상품화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버킷리스트가 유행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같은 제목의 영화라 한다. 감독은 1980년대 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만들었고, 지금 보아도 재미있는 70년대 TV 시트콤 <All in the Family>에서 ‘Meathead’란 별명으로 불리던 주인공의 사위 역할로 유명했던 랍 라이너(Rob Reiner)였다. <버킷리스트>란 영화는 라이너의 작품이라 하기엔 너무 엉성하고 내용 없는 영화였다. 버킷리스트 현상과 그 영화는 별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내용 중에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 영화는 암 환자가 죽기 전에 (버킷을 차버리기 전에)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들을 가본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에 있다. 영화에서는 타지마할, 히말라야, 프랑스 리비에라 등이다. 주인공의 삶과 죽음과 아무 연관이 없는 유명한 관광지들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는 소비문화와 상품화 된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내가 들어본 버킷리스트의 목록은 대게 죽기 전까지 해보고 싶고 가보고 싶은 것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더 드려다 보면 죽음 앞에서의 소망보다는 욕망, 단지 죽기 전에 삶이란 버킷을 더 채우겠다는 욕망이 담겨있는 걸 보게 된다. 그 목록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내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이 시대 자본주의의 가치를 주로 담고 있다. 자본주의의 인간은 소비하는 사람이다. 버킷리스트가 흔히 지향하는 모습은 상품화된 세상을 끝까지 향유하고 소비하고 떠나는, 즉 자본주의 인간을 실천하고 완성하고 떠나는 모습이다. 더 심하게 얘기하면 죽음의 상품화 또는 죽음을 파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 장례식장에 가면 고인의 생전 모습을 비디오 또는 사진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버킷리스트를 실천한 것이라 보이는 내용도 목격하게 된다. 관광명소나 신비스런 외국의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잘 산 삶의 표식처럼 등장한다. 마치 인간에게 세상이 즐김과 만족의 대상인 것처럼. 삶이란 버킷을 끝없이 더 많은 생산과 욕구와 소비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버킷리스트 현상은 ‘죽기 전에’라는 위협으로 세상을 더 소비하게 만든다. 하지만 삶이란 버킷을 세상을 향한 욕망의 목록이 아니라 반성과 비움의 목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모든 고전적인 사상의 출발점이다. 그런 사상이 안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버킷리스트까지 만들어 죽기까지 소비하는 인간형을 부추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