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들의 삶은 아픔을 겪을 때 생이 증거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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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시카고한미상록회장)

 

세상을 지어시고 그 주인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참으로 짓궂어 시다고 한 말이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하고 자문해보는 그 횟수가 요즈음 부쩍 들어 늘어났다. 그런 생각을 자주하게 된 원인은 내가 몸이 아파 괴로움을 겪고 있는 부산물인 것 같다. 좀 더 상세하게 내 생각을 말하면 사람의 고난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인내하는 힘을 배양하시려는 목적으로 예비하신 섭리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일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장년기를 지나 나이가 더할수록 육신은 상대적으로 쇄약해지고 정신적으로도 건전한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인 것 같다. 이러한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인내(因內)하는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힘은 하느님이 예비하신 상대적인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얻어지는 까다로운 상급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짓궂어 시단 편견을 합리화 한다. 물론 동일한 사람의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서 말로 표현된 결론은 하느님이 그 사람에게 허락하신 지혜의 한계란 생각도 자아의 외람 된 생각이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지혜의 그 한계다. 얼핏 객관적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이런 생각을 미화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나의 이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의 목적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이 기도라면 이를 두고 전입가경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미리 고려하지 않은 것은 더욱 아니다. 나는 근래에 어느 가난한 교회를 통하여 영주권을 받아 쥐고 교회를 떠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어느 목사의 만행이 너무 충격적인데다가, 물론 영주권이 나오기까지 불법적 행위는 자기 호신의 수단으로 사용 되는 목사의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이 얻어 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알 수가 없는 내 마음도 고까워한다. 물론 나는 하느님의 목적 안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도전이기도 하다. 이런 나는 자아의 판단 안에서나마 충실한 공평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 생각은 정의는 공평이라 하신 하느님이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실행하시기 까지 공평을 가르치심에 의존하여 세상사람 누구에게라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심정에서 시작 되었을 것 같다. 특히 몸이 아파 고통 받는 순간에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정말 인내하기 힘들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당사자의 인내와는 무관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말았다.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 ‘인내를 포기하고 공평을 누릴 수는 없을까!’하고 회답 찾기에 골몰해진다. 결론은 없었다. 내가 생을 누리는 한! 내가 이처럼 힘들어 하는 시기에 cbmc(기독실업인)라는 단체가 “거물을 던져라”라고 하는 명재를 내걸어 놓고, 시카고에서 북미주 연합대회가 열렸었다. 나도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6주 전에 등록금을 완불하고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6주 전에는 건강상 이유로 대회 참석이 불가능 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악화로 나는 대회참석이 불가능했다. cbmc(기독실업인)라는 단체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예수를 믿는 사업가나 전문 직업인이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려하는 행위신앙 추구단체라 하면 될 정도다. 물론 설명이 완벽하지는 않다고 인정한다. 그게 나의 한계이다. 그리고 위문이 있는 사람이 질문 해 온다면 나의 한계라고 하는 답변의 구실도 필요하니까. 암튼 그들은 찢어진 거물을 던진 경우가 되고 말았다. 왜냐 하면 등록한 회원이 불참했으면 대회행사 시작 전에 확인만은 했어야 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를 대신하여 제 삼자라도 참석케 하면 그리스도를 증거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회가 끝나고의 소통은 이미 무시당한 작은 고기는 그들이 던진 찢어진 거물을 빠져 나간 후일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이다. 시카고에 던졌든 거물은 미시건 호수에 맞지 않는 고래잡이 거물일 수도 있어 실망은 않으려고 애쓰는 자아가, 애처로워서 하느님께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졌다. 동일한 시간의 가치는 한번 결정되면 불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