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원리와 진리의 본질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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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시카고한미상록회장)

 

내가 사는 남향집 침실의 창가에 서면 오헤어 공항에서 일어나는 항공기 이착륙 현상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그때 마다 공항활주로에서 힘차게 이륙하는 장면 속의 거대하고 웅장한 비행기를 의식 없이 바라볼 수가 없었다. 비행기의 고도가 다 잡혔다고 판단 될 때까지!

특히 내가 두려워하는 그 이유가 1979년 5월25일 공항에서 이륙하던 American Air. 소속 민간 항공기가 Elk Grove 인근에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과 모빌 House 에 살든 주민까지 더하여 273명이 사망한 사건을 근거리에서 바라본 후 내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저렇게 크고 무거운 항공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장관(壯觀)을 모든 사람들이 그 원리를 잘 알고 있어서 무관심 하거나 안심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관심 했다면 이러한 무관심은 아마도 생활 속에서 빚어진 타성일 것이다. 타성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처럼 어떤 타성에 휩쓸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타성에 휩쓸려 그렇게 무서운 사고의 가능성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 무서움! 이것을 묻어버리는 것이 타성이란 말이다. 나는 어느 공학박사에게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접대하며 밤을 새워가며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과학적 원리, 그 하나만을 배운 과거가 있다. 그 원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서 비행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킨다는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이란 전면을 향해 질주하는 힘에 저항하는 반작용이 비행기의 몸체를 위로 날려 보낸다는 설명이었다. 참 쉬운 듯 설명을 하고 듣는 나는 참 어렵게 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하나, 주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반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 받지 못했다. 작용과 반작용의 운용원리의 공평성이 인류공영에 활용할 수 있는 양질의 한계가 과학에 의지 할 수 있는 삶의 한계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리고 물리적인 변화 속에서는 이변이란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요즈음 건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현상을 체험하면서 이 현상이 문리적인 변화냐 아니면 이변을 체험하는 것인가 하고 고민을 하는 중, 역시 여기서도 이변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살아있는 생체(生體)는 소 자연으로 대 자연현상의 원리 혹은 변화하는 진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랴! 그러나 사람은 지혜란 특전을 누리므로 자연 속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작용과 반작용을 삶에 활용하듯 인체에서도 외부와의 반응에서 이 독(異毒) 제독(制毒)의 원리를 응용하고 상대성원리에서 반작용으로 작용하는 힘을 다스리며 공평을 유도(誘導)하며 삶의 가치를 확대한다. 설사 사람의 능력으로 작용과 반작용의 힘의 균형을 유도하지 못해도 자연의 섭리가 그 균형을 다스린다. 이는 인간관계 설정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힘을 가진 쪽에서 작용한 힘의 방향은 작용한 만큼의 반작용의 힘으로 구심점으로 돌아온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대한민국의 국민의식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망하면 5.18 민주화 유공자의 연금도 망가진다. 전교조도, 양대 노총도 기득권까지 망가지는 결과는 필연이다. 물론 세월호란 해상사고의 억지 보상금도 반작용에 의해 와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 기득권에 특수를 누리는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는 것은 관심이 없어 보인다. 현실은 세월호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5.18 유공자 명단을 숨기는데 급급함도 아니요, 북한에 의한 국가의 존망을 염려할 때다. 대한미국의 애국가와 태극기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물론 인민공화국이 건국하기 이전에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던 구심점이요, 국혼(國魂)을 되살리던 불씨였다. 더욱이 동계올림픽 주최국이 자국의 국기를 사용치 못하고 반도기라니! 오호 망국의 슬픔이여 통재라!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망국의 징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