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위안부 운동 26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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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봉완 사학 박사

워싱톤 정신대 대책위원회 이사/고문

시카고 소녀상 건립 대책 위원회 회원

 

<어원>

위안부란, 왜곡된 말로서, 그의 진의는, 전 미 국무 장관이었던 힐라리 클린톤이 2012년에 말했듯이 성노예다. 처음에는 20만, 현재로 40만명으로 추축되는 젊은 여자와 어린 여아들이 납치됐거나 좋은 직장 빙자한 유혹에 당해 태평양전쟁 15년간(1931-1945)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게 강제 성교에 종사해야 했던 여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이 강점했던 중국, 대만,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무어,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의 젊은 여인들이었다. 이중 조선 여인들이 20만의 80%였다. 그이유는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이었기에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이 조선 여인을 다른 나라 여인들 보다 좋아 했다한다. 안색이 희고 체격이 좋고 아름답게 보았다 한다.

위안부의 어원은 일본의 남존 여비의 유교를 기본으로 하고, 무인 존중 전통 사상에 더불어 일본에 고유한 성에 집착돼 있는 문화에 근원이 있다고 본다. 일본의 성 관습은 우리나라와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는 고래로 결혼전 성교를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장려했다. 공창제도가 옛부터 존재해 있었고 1950년대까지 지속됐었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들이 성교를 남성에게 허락하면서 위안을 해준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가 전쟁중에 강화된다. 여기에는 2가지 기원이 있다. 첫째, 일본 군대는 신으로 숭배했던 일본 황제에게 남자들은 절대 봉사와 희생을 하여 전쟁에 나가야 하는데, 여성들이 최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는 일, 즉, 성교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둘째, 일본 군인간에는 이상한 전설이 있었다. 일선에 출도하기 직전에 성교를 하면 총살이 몸에서 반사하여 사망을 막는다는 허망하고 망상적인 미신이었다. 그리하여 출도명령을 받으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일본 정부의 직접 수립>

이렇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제도는 일본 정부가 직접 마련했다. 일본군이 1932년 2월에 샹하이를 정복했을때 일 군인의 성폭행이 극단적으로 심했다. 그 역효과로 많은 일 군인들이 성병에 걸려 군대 위생에 큰 위기를 초래했다. 그런 상태의 재생을 막기 위하여 일 사령관이 군에서 직접 관리하는 위안소를 세워 예방과 치료의 의료시설을 설립하였다. 이 시설은 일본정부, 그위로는 천황의 직하에 있어 직접 명령을 받게 되있다. 현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지체하고 있다.

<생 지옥 생활>

일단 끌려가면 어린 여인들은 직장이 아니라 ‘위안소’ 라는 곳에 머물게 되는데, 이곳은 가시 철망으로 둘려 싸있는 감옥같은 곳이며 여기에서 탈출을 기도했다가는 사형을 당하는 곳이었다. 숙소는 독방이 거의 없었으나 군인과 성교를 하는 곳은 겨우 1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곡간 같은 곳이었다. 성교의 경험은 커녕,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여인들은 하루에 30-40 번의 변을 당했다. 쉴 사이도 씻을 사이도 없이 낮에는 졸병, 저녁과 밤에는 장교급의 일본 군인이 들어섰다. 이로 인하여 그 자리가 헐었음은 물론, 염증이 나도 너무 심해질 때까지 계속해야 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 쓰러지면 일으키고 꾀병핀다고 구타당하고, 심한 경우에는 얻어 맞아 죽기도 했다. 신체의 고통은 물론, 그 모욕과 굴욕감을 누가 알 것인가? 그러다가 임신하면 강제로 낙태시키고 심한 경우에는 임신부의 배를 칼로 베어 태아를 꺼집어낸 일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어린 여인들을 직업적인 창부라 하고 임금을 받았다 한다. 초창기 1930년대는 이 여인들에게 ‘쿠폰’을 분배했는데, 나중에는 이것마저 정규적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시일이 지나면서는 시가 현찰로 전환할 가치가 전무해졌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들은 지옥같은 생활을 하면서 성교를 제공해야만 했던 성노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