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일기장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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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삼(전 주립병원 정신과의사/시카고)

 

두 아들이 각자의 생활흐름을 윤색하며 떠나 버린뒤 은퇴한 노부부는 아담한 콘도를 선택한다. 칠십 중반을 넘어서 거주지를 바꾸라는 권고 따위는 추천할만한 일이 못 된다. 복마전이 되어버린 3 베드룸, 다락방과 지하실 방에 쌓인 주체할 길 없는 잡동사니. 큰마음 먹어도 젊은 날의 흔적이 흥건한 지나간 살림사리를 정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조금전 코흘리개 시절 육이오 동란을 겪은 허허벌판에서 일인(japanese)들이 번역한 서구소설을 재탕 어설프게 한글로 중역해놓은 번역물을 읽으며, 제주소를 잃은채, ‘ 실존주의 철학’  ‘키일케고르’ ‘ 쌩떽쥐뻬리’등 우리와 전혀 상관도 없는 먼나라 남의 이야기로 텅빈 가슴을 채우던 답답한 시대의 산물인 나와 나의 아내 미스 김은 또 이렇게 눈물도 인정도 없다는 캐피탈리즘의 대륙에서 뱅그르르 고추먹고 맴맴 로맨티시즘을 구가했던 것이다.

쥴리앙 뒤비비에 무도회의 수첩. 삼십칠년전 어느 겨울날, 나의 일기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눈길을 함께 걷고 싶어 아내 직장으로 전화를 건다.’ 워터 타워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일과가 끝나는대로 나와다오. 청색 맥씨 오버코트를 입고 알맞는 긴 가죽장화를 신고있는 아내는 눈길을 밟으며 거수경례를 해보이는 것이 프러시아 아름다운 여군장교의 모습이다.

근무처 병원 앞에서 방금 사들고 온 튜립 꽃송이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남자애인쪽이 꽃을 들고 나타나는 건데 내 폼이 영 구겨졌다 하니 아내는 염려마라는 듯 눈으로 미소하는데 얼핏 울었는지 눈시울이 촉촉해 보인다. 아내는 여느 때보다 더 깊이 나의 팔에 매달릴 듯 다가서서 걷는다. 스스로 말문을 열도록 조용히 발걸음을 늦춘다. 나는 아내의 가슴속에 일고 있는 감정의 밀물이 어처구니 없도록 선명하게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교감을 통한 육체의 물결속 남녀간의 사랑은 가장 완벽한 의사소통이라 하던가!? 방금 사랑을 나누고 누운 채 담배를 피우는 나는 하룻밤 연인들처럼 후줄근 젖은 공허감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의 헝클어진 머리칼이 땀으로 젖어있다. 육체적 애정표시라는 것이 단순한 생리적 현상일 수도 있겠지.

마음먹기와는 달리 아내는 긴 장화를 신고 걷는 눈길이 쉬 피곤하다며 쉴곳을 찾는다. 카페 아티스트는 미시간 길을 향한 동쪽으로 트인 넓은 유리창넘어 시카고 미술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도 미술품이 진열된 동양관에 시바신과 여신 샤크티가 알몸둥이로 어울려 꿈틀거리는 조각상이 있다.  우파니샤드는 영혼과 육신을 분리한 채 이룬 남녀의 사랑은허구라고 가르친다. 힌두교의 여신은 신성한(?) 동정녀라기보다는 육감적으로 숨막히는 관능미 넘치는 것이 흥미있다. 젊은 웨이터가 친절하게 가져온 유리물병에 튜립꽃을 담는 아내는 일터에서 울적하던 마음을 달래려 꽃을 샀다고 했다.

아내와 십여년을 함께 일하며 가까운 M이라는 아이리쉬 여인이 음독자살을 한 것이다.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으로 이십여년 고통하던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1주일 휴가를 받아 남쪽 바닷가 휴양지를 다녀온다던 M의 부음을 아침결 직장에서 받은 것이다.

병세가 급작스레 나뻐지는가 하면 감쪽같이 호전되기도 하는 기복의 되풀이가 특징인 신경계 질환을 결혼초에 진단받은 M씨 부부의 결혼생활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신앙심이 두터운 캐톨릭 신자인 M씨 부부가 댁으로 신부님을 모시는 모임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이미 스테로이드계 약물의 장기복용으로 피할 수 없는 전신 부작용이 완연한 M씨는 조금도 어두운 그늘이 없어 보인다.

자신보다 덜 행복한 이들을 돕고 있는 M씨는 아이리쉬 알콜중독자 치료기금을 확보하는 자선단체에서 무보수로 일한다. 하체가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한 최근에는 휠체어를 타고 전산기회사 밤일을 한다고 했다. 미세스 M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애란민요를 열창하는 부부의 흥겨운 노래는 신부님과 합세한 우리들을 능가 하도록 힘차고 밝다. 저녁식사 모임은 개방적인 신부님의 중재를 받으며 부부의 성생활에 관한 비밀스러운 의견도 기탄없이 교환하게된다.  D.H. 로렌스도 인용하는 M씨 부부는 성생활의 어려움을 대체로 잘 극복하는 듯하다.

아내는 지난 십일월 중순 M을 불러내 함께 오페라 공연을 갔었다. 남편이 육개월넘기기 어렵다는 선고를 받고 직장에서 넋을 잃고있는 M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양이였으리라. 공연후 M과 함께 커피숍에 들린 아내의 귀가시간이 많이 늦었다. 튜립 한송이를 눈가로 가져가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아내는 연민의 정으로 소리를 죽이며 흐느낀다.  그날 늦은 밤 M은 아내에게 엄청난 비밀을 고백한 것이다.

M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스스로를 산산조각 찢고 있었다는 것이다. M은 죽도록 자신을 저주하며 지난 반년 동안 같은 직장 남자동료의 끈질긴 유혹에 반복적으로 무너져 왔던 것이다. 고해성사 조차도 거부하며 자신을 학대하는가 하면 스스로 생명을 끊어버릴까 그것은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가혹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는가하면 소리죽여 코를 푸는 아내는 친구의 사연을 말하면서 자신도 용서를 구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조금 높은듯한 실내온도를 비로소 의식하는 아내는 오버코트를 벗으며, “눈물 땜에 눈화장 다 지워졌죠 ?” 한다. 아내가 오늘 하루동안 더 성숙해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