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창조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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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조물주(造物主) 이외엔 누구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수는 없다고 믿는다.  즉 창조(creation)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란 의미이다.  다만 인간들에게는 창조가 아닌  창조적(creative)인 삶속에서 살아 간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노년에 맞이 하는 새로운 변화의 삶이란 깊숙히 숨겨 놓았던 보석들을 하나 하나 꺼내 놓는 삶이라 칭하고 싶다.  가진자나 조금 덜 가진자나, 많이 배웠거나 적게 배웠거나를 막론하고,  신체적인 변화에 의한 “느림의 미학” 에 심취된 사람들 이기에 하는 말이다.  누구나 다 노년에 나타나는 증상을 같이 느끼는 것이다. 젊었을 때 무슨 운동을 했건간에 그런건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바쁘게 움직이려 해도 모든 신체 기능이 이를 허락치 않는다.  느린 움직임은 노년이 되어야만 맛 볼수 있는 특혜(?)이다.  즉 창조적인 삶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위대한 마법을 늙어 가면서 갖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노년이라하여 천편일률적으로 같지는 않다.  수학 공식에 대입을 시켜 보면, 공통 분모는 다 같고 분자만 다를 것이다. 창조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꼭 젊은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노년에게도 새로운 창조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찾아 낼 수가 있다.

쌓아 온 지혜를 이용하는 것도 창조적인 삶이고,  현재만 보고 사는 것도 창조적인 삶이다.  친구없이도 시간을 잘 보내며 사는 것도 창조적인 삶이다. 때가 되면 일어나고,  때가 되면 먹고 자는 것도, 즉 시간에 맞추어 사는 것도 창조적인 삶이다.  대나무는 풀과에 속하는데 이름은 대나무이다. 줄기가 시들어질 때라야 꽃을 피운다.  마찬가지로 노년이 되어야 진정한 창조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도 노인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 세상의 모든 책을 태워 버리더라도 도스토옙스키의  책만은 남겨 놓아야 한다. “ 인데, 이 말을 한 사람이 의외로  레프 톨스토이이다. 톨스토이가 지적한 책은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이다.  이 작품은 1860년대 러시아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카라마조프 일가( 一家) 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지나치리만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 됨으로서 자극적인 사건은 더욱 흥미롭게 진행이 된다. 이 소설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1959년도 11월 쯤 이다.  이 소설은 문학의 한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톨스토이가 극찬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숨은 뜻은 노년에도 뭔가 모를 호기심(curiocity) 이 발동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호기심을 풀어 보려는 열정 (passion)을 갖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무서운 적( 敵 )인 치매로 부터의 방어를 하고자 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러기에 노후에도 또다른 창조적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거다.  대나무가 시들어야 꽃이 피듯이 말이다.  톨스토이 역시 늙으막에 창조적인 평가를 한 것 같다.

많은 노년들은 자신의 나이 듦이 멈추어 있거나, 아니면 쇠퇴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경을 이겨 낼 힘이 있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존재로 자신을 인식 하는게 중요하다.  또한 노년에도 지속적으로 배움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일리노이즈 주에는 “ 희망의 초원 (Hope Meadows)” 이 있다.  노인들과 입양아들이 어울려서 사는 작은 동네이다. 아이들 양육에 힘을 보태고 있는 노인들은 모두가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노년들 부모세대 때에는 환갑 잔치가 유행이였을 정도로 흔한 사회상이였다. 지금은 그 보다 20년 30년 혹은 40년을 더 살게 되었다.  이런데도 창조적인 삶을 외면 할 수가 있을까?  긴긴 세월이 남았는데도 미리부터 늙은이로 살 생각은 버려야 한다. 창조적인 삶이란 주관적인 삶이어야 한다. 노력하고 생각하며 사는 노인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육체의 건강위에는 정신 건강이 자리 매김을 하고 있어야 함을 잊으면 안 될것 같다.

이것만이 노년의 적(敵) 인 치매(癡呆 = Dementia) 예방의 마지노선 인듯 싶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