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추억이란 모두가 허상(虛像)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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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시카고한미상록회장)

 

추억은 살아가는 현실을 아름답게도 간혹은 추하고 아프게도 하지만 모두가 현실과 거리가 먼 허상이거나 지나간 실상(사진), 혹은 기억속의 잔영이기 쉽습니다. 내가 이년 전 이맘 때CANADA(카나다) 앨버타를 경유, 럭키산맥을 넘어 밴쿠버까지 가며 사진 몇 장은 찍어 나의 페이스 북(Face-Book)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진들 중 가장 “좋아요”를 많이 받은 사진으로 선택되어 추억 돌아보기에 소개되어 오늘 아침 훑어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진 속의 풍경은 사진을 찍을 때와 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장소로 돌아가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 속에 들어있는 나의모습은 오늘 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 이년 전 그때 이년 후 오늘의 나를 상상해 보았던 기억이 전혀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때는 건강한 몸으로 산수를 유람하며 녹아내리는 빙하를 보고 생태환경의 미래를 염려하였지만 이년 후 나의 건강은 심각하게 염려하진 않았습니다. 그러한 내가 하느님의 섭리를 순종한 결과라면 오늘 내가 몸이 아픔에 대한 상심하는 일도 없어야 하겠지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안위에 대한 염려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순종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분명 나는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심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기다 더하여 나는 한 사람으로서의 사고의 모순과 믿음의 갈등까지 격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아(自我)란 성역(聖域)을 벗어날 수 없는데 벗어난 것처럼 행동하고 우쭐되고 있거나 우쭐되는 실태를 보았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구원을 누린다고 그럴싸하게 말하는 것도 자아의 범주(範疇) 안에서 판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치시면 내침을 당한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상상하고 정당한 가치를 창출하여 가르쳐 공유하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기복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역시 지극히 작은 부분적이며 부활의 능력을 바로 깨닫기는 태부족! 말로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길 원한다지만 내일의 안락을 염려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다 가심으로, 말씀의 계시를 삶과 죽음(헌신)으로 완성하셨다면 그를 배운 나는 예수님이 완성하신 계시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는 자책이 앞섭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예수님을 다 안다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관여 하거나 말거나 하느님은 창조섭리를 완성해 가신다는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 하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전능(全能)의 힘이 아니라 공평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독생자(獨生子) 예수님을 사탄에게 대속 제물로 주시어 공평을 이루신 성경의 기록, 즉 말씀입니다. 힘이 없어 빼앗긴 것이 아니라 공평을 이루시려고 선택하신 대 사건이 바로 세상 구원이란 결과! 이런 경우에는 합리적 논리 그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헌신을 가르쳐 본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위를 계시하는 카리스마를 확립해갑니다. 대게 이런 목사님은 그들 눈에는 마치 예수님은 죽고 없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 서글퍼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될 수가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그리스도(구원)는 형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려하는 사랑이며 이런 사랑도 정의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불의에 용감히 맞서 공평한 세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어쩌면 ‘사명감’이란 이 용어마저 자아의 합리화가 아니라 주님의 헌신이 나를 감동시킨 진정한 결과이기 바라지만 나도 나를 알지 못하는 내일이 다가옵니다. 변화 속에는 결과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하느님이 공평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면 두려운 마음이야 가시지 않지만 순종할 준비에 준비만을 거듭합니다. 아마 이 준비의 결실은 관조의 눈이 열릴 때쯤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