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BMC” 란!(필자 주) 지난주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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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최순봉(시카고한미상록회장)

 

그렇다면 제일이라 말한 불변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는 대상(對象)을 향한 자기 마음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여기서 혹자는 그 대상이 공의(정의)가 아닌 것을 집착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CBMC 회원들에게는 해당이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연륜이 더해질수록 가장 무서운 구속력을 가진 성경 갈라디아서 2장 19-20절 내용으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내용에 나와 한께 구속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절 내용은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죄지은 나의 과거를 죽여 물속에 장사지내고 성 삼위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뿐 아니다. 20 절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라는 이 구절을 읽다가 나는 CBMC의 비전과 본질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회원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회원이 거주하는 현장은 이미 하늘나라란 사실이다. 그리고 감당해야 할 사역은 각 회원의 ‘생활공간이 하늘나라임을 증거 하는’ 사역이다. 하늘나라가 임하게 하는 사역은 말씀 중심사역으로 전도와 봉사와 교육의 구심점인 교회의 사역이다. 신행일치의 삶을 통하여 ‘생활공간이 하늘나라임을 증거 하는’ 행위사역으로 정확하게 이 부분이 교회와 CBMC가 다른 점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각 회원의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과 사역의 차이가 있다 해도 모두가 그리스도이다. 각 회원 안에 거하시는 성령, 자신의 삶이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삶이란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정한다면 얼마나 자신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운가를 분별해야한다. 행위사역은 계시사역으로 보는 사람의 평가가 따른다. 다시 말해 이웃들이 나의 행동거지를 보고 나를 욕하게 될 일을 스스로 저지르면 내 안에 있는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그리 살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CBMC의 본질은 각자가 그리스도(구원)의 품격을 완성해가는 현장사역이다.

이제는 필자가 주장하는 CBMC의 정체성을 정리할까 한다. 물론 모든 회원이 공감이 없는 한 필자의 편견이므로 구애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1) CBMC란 각 회원의 생활공간이 하늘나라임을 증거 하는 행위사역이다. 2) 회원 각자가 성도(聖道)로서 그리스도(구원)의 품격을 완성해가는 현장사역이다. 이처럼 정체성을 정리한 역사적 배경으로는 처음 크리스천 시민운동으로 그 명칭을 CBMC라 명명하며 Connecting Business & Marketplace Christ 란 이 말을 우리말로 번역풀이 확대해석하면 생활공간에서 하늘나라임을 증거 한다고 풀이할 수 있어서다. 성서적 배경으로는 하늘나라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임제한 곳이 그 어디든 하늘나라란 믿음과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하신 말씀의 뜻은 그 순간까지 구원의 사역은 진행형이었단 말이 되기에 육신적인 삶은 그 완성을 향한 진행이란 뜻을 가미했다.

여기서도 CBMC 회원은 집사나 장로나 권사나 목사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품격을 완성해감을 강조한 것은 교회의 직제가 자칫 계급화하고 있는 현실과의 차별화이고 완성된 하늘나라에는 주님과 성도뿐이란 것을 믿기 때문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장로니 권사니 집사니 혹은 목사니 하고 계급처럼 호칭 받는다 해도 그 호칭은 공동묘지의 묘비에 사용하기까지가 끝이다. 묘비에도 성도임을 확신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실상을 찾아 증거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말미에 말해두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교회의 모든 직제는, 사역하는 직분이며 사역은 사랑의 수단이요, 사랑의 절정은 자기 헌신이요, 그 시작은 섬김에 있다는 말을 더해 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