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I am sorry for your l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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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섭 장의사/시카고

기독교의 성경에 욥기라는 책이 있다. 내용인즉 구약시대에 욥이라는 의인이 살았는데 한 날 사단이 하나님께 찾아 와 욥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가정과 재물을 넘치도록 풍성히 받았기 때문이라고 은근히 시비를 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몸은 건드리지 말고 마음대로 해보라고 허락한다. 그래서 욥의 열 자녀가 하루아침에 모두 죽고 수많은 가축과 재산이 없어진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기에 사단은 육신을 치라고 종용한다. 하나님은 사단이 욥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조건으로 그를 사단의 손에 붙인다. 결국 욥은 견디기 힘든 육신의 고통 속에 처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세 친구가 조문을 와서 욥과 주고 받는 대화가 이 책을 엮어 간다. 이 책에서 한 민족의 장례풍습을 엿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망인을 매장하고 일주간(칠일)동안 쉬바라고 칭하는 애도 기간을 지키는데 그 동안 유가족들은 집안의 거울은 모두 돌려놓고 수염은 깍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으며 방 바닥에 앉아 있다. 상가에서는 조객들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게 집 문을 열어 놓는다. 이때 문상 오는 조객들은 상주가 그 시간 무엇을 생각하며 얼마나 애통해하고 있는지 모르기에 유가족이 입을 열어 말을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나는 랍비가 쓴 책을 읽고 인상 깊고 진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미국의 서부에 사는 저자가 쉬바 기간 중 조문하러 NY까지 갔었다. 그 먼 거리를 가서 몇 시간 동안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침묵가운데 있다가 돌아왔었다고 기록했다. 유가족은 조객이 와서 한 방에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작은 동포사회이지만 이민생활의 연륜이 더해 가기에 우리가 장례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요즈음 많다. 유가족을 대하면서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 지 몰라 쉽게 하는 말들이 “힘내세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등등이다” 한 생을 향유하시고 자녀 손을 누리신 어른의 장례는 호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위로의 말을 고민스럽게 택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루 아침에 젊은 자식을 혹은 남편, 아내, 동생을 잃고 치러는 장례에서는 여간 어렵지 않다.

최근 젊은 자식이 일상처럼 출근하였는데 일터에서 어지럼을 호소한 후 쓰러졌다. 갑자기 자식을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조문을 하는 사람도 충격적인 소식에 할 말을 잃는다. 그런데도 우리 한인들은 한 마디라도 위로의 말을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섣불리 입을 뗀다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등등” 옆에서 듣기가 민망스러웠다. 과연 그런 위로의 말이 며칠 전 졸지에 자식 혹은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전해질까? 상대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진정 나의 아픔이 된다면 결코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욥기에 흐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이 욥을 찾아 온 세 친구들처럼 상황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 실수는 피해야 한다.

I am sorry for your loss 라고 조의를 표하는 영어가 있다. Sorry는 Sorrow(슬픔) 이라는 낱말의 형용사이다. 보통 미국에서 I am sorry 하면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뉘우칩니다 라는 뜻으로 말을 하지만 숨은 뜻은 나도 슬프다 나도 가슴 아프다 라는 말이다. For your loss는 For your loss of beloved One(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사별함) 의 준말이다. I am sorry for your loss 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게 되니 나도 가슴 아프고 슬프다 라는 말이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피해야 할 조문 인사를 생각하다가 욥기를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평소 유대인의 생활과 장례풍습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욥기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 궁금하여 다시 펴 보았을 때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2장 마지막 절과 3장 첫 절이 다음과 같다. “칠 일 칠 야를 그(욥)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4장 일절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조문 온 친구)가 대답하여 가로되…” 놀랍게도 성경이 쓰여진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의 풍습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은 지금도 그들의 풍습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민족에 따라 전통과 풍습은 다르다. 다른 것을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사별로 인한 슬픔에 잠겨있는 가족에게, 특별히 충격적인 사별을 맞는 가족에게 갔을 때 무슨 위로의 말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갔다는 자체만으로 슬픔에 동참한다. 진실 없는 어설픈 위로의 말은 반감만을 유발하기 쉽다. 유가족이 어떤 심리적 상태에 있는지 모르기에 그들의 감정을 존중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가족이 혹시 먼저 입을 열어 “와 주셔서 감사하다” 고 한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님을 사별하기에 나도 가슴 아프다. I am sorry for your loss” 정도 대답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마주보고 인사하는 무언의 눈길 속에 위로의 마음은 온전히 전해지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