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고토(故土), 연해주(프리모르스키)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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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관헌 칼럼니스트

 

연해주하면 지금은 러시아연방이 차지한 흑룡강 이동의 동북태평양연안을 따라 미국령 알라스카를 사이에 둔 동남부 시(사이)베리아연안을 지칭하며, 우리 조상들에게는 내, 외의 적에게 쫓겨나야 할 때, 쉬어가던 간난(艱難)의 땅이었다. 고구려인이 당과 신라의 압박을 피하여 말갈과 부여족이 한동안 이곳에 피난하다 고토를 회복, 대 진국(당은 해동성국 또는 발해로 부를 뿐 삼한의 다른 이름 辰國으로 부르지 않음)의 터전이 연해주이며, 고려에 밀린 신라유민이 금과 청으로 웅비할 때 까지 힘을 기른 곳이기도 하다. 당, 고구려, 발해, 글안, 송, 금, 원, 청이 서로 각추(角錐)하던 시절엔 이곳도 고려, 조선과 같이 중원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변방으로 방치했던 곳이다. 이곳에 잠깐 머물렀다 송화, 요하유역의 옥토를 회복하거나, 더 동쪽으로 동남진하여 살만한 땅으로 내려오다 돌아가지 못하고 딴 나라를 펼쳐나간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역사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 내지 이웃사촌들이 연해주를 거쳐 간 것이 고대사로 남지 못하고, 그들 중 극소수만이 다시 환(還)고토(故土) 한 사례가 캄차카, 일본, 그리고 신라 가야 역사에 그 흔적을 남기지만, 연해주에서 출토된 7,000년 넘는 유물들을, 그 입구에서 큰 호랑이와 곰의 박제(剝製)가 이곳 박물관 안에 볼 수 있고, 발해시기의 유적, 유물은 물론, 19세기와 20세기에 남긴 한인들의 한족의 흔적을 연추, 부라디보스토크, 하바르스크, 이츠크 등 한인벨트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현지 한인들이 남긴 기록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고, 상해임시정부의 재정부장으로 있던 최재형열사, 그가 순국할 때 살던 집을 들러보면서 만감이 눈시울을 뜨겁게하고, 선배들이 격은 고통을 보상받아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15일(2018)까지 1주일이라는 짧은 부산과 러시아 일정이지만 두 번째 이곳 연해주 방문은 좀 여유있고, 10년 전, 막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었다가 고토로 돌아온 소수의 고려인들에게 정착을 위한 Micro-Loan가능성, 문화원건립, 주택개선 등을 탐색, 자문하기 위한 첫 방문보다 호화(?)로운 것이었다. 현지 전문 안내인과 한인거주지역의 러시아 시청관계자들과 환경, 문화교류와 협력을 위한 학술세미나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심적 여유도 있었다. 이미 이곳 문화공관이 완공되어 고려인과 다른 러시아주민이 풍물, 고전무용, 태권도 등 한국문화공부가 한창인걸 보니 격세지감이 있었고, 한방진료 등 의료봉사로 선보이던 초기 건물이 점점 커져서 완공된 건물은 참으로 당당하게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공공건물로 개방된 독립투사이며 사업가였던 최재형선생의 마지막 집이 한인들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공공장소가 되어 독립운동사를 되새길 수 있었다. 날씨는 서울보다 연중 2. 3도 차이로 기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니 구한 말, 천대받던 소작농들이나 노비들이 기근을 피해서 이 신천지에 모여든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더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침략과 강압적 약탈이 심해지고, 국내외의 독립군 토벌이 심해지자 러시아의 새 군사기지며 불모지인 연해주는 우리한인들에겐 하늘이 준 고토가 되기에 알맞았다. 러시아가 군대를 파견했을 때, 이 지역에는 보급물자를 대줄 기업이 없었으며 조직적인 노동력을 제공받을 기관도 없어, 당시 러시아인들 보다 더 많은, 20만 한인들은 군 주둔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으로 자연스레 러시아 선장의 입양아로, 훌륭한 가정교육과 오랜 국제선원(船員)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사람들과 사업을 하는데 적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권업회를 만들어 한인들과 협력하여 처음에는 백러시아 군에, 1922년 후에는 신 소련군 군납을 전담하면서 크게 번 돈으로 독립군에 신무기와 자금을 공급하는 숨은 지도자가 되었다. 연해주 연추에 살던 안중근의 이등박문총살성공으로 일본군미움을 산 그를 가만 두지 않고, 스탈린도 얼굴이 같은 일본인과 제유할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18만 조선인을 중앙아시아에 강제수용하여 그 반인도적 행위는 히틀러의 유태인학살에 비견된다. 이 혹독한 만행으로 첫 1년에 4만 여명이 죽고, 그 생존권침탈이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이나 위안부의 그것을 넘는 악행이었다. 종전 후 독일, 일본, 미국이이 반인도적 만행을 사과, 보상한 것과 같이 러시아도 스탈린의 만행에 대하여 사과와 보상을 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권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