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교육 칼럼 22] 커뮤니케이션 속의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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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노스파크 대학 생물학 교수)
장재혁 (무디신학대 작곡과 교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소통 한다는 뜻이다. 의사를 전해야 할 때도 있고, 들어야 할 때도 있고, 상호간 상의해가며 행해지는 커뮤니케이션도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소통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인성의 영향을 느끼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을 두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다루어지는 ‘내용’이고 또다른 하나는 그 내용을 어떻게 전하는가, 즉 ‘소통의 방법’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전달하느냐, 혹은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달라진다. 심지어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마저도 달리 와닿게 된다.

 

오래전 한국의 한 법정에서 어떤 재벌총수가 회사 사원들을 머슴에 비유하며 자신을 변론했던 뉴스기사를 기억한다. 피고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던 그 재벌총수는 자신은 회사의 주인이므로 회사 사원들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만하면 된다는 발상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기업의 총수를 사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과연 회사의 방침이나 뜻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고 수행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와 반대로 입사시험에서 탈락한 지원자들에게 일일이 탈락편지를 보내면서 비록 자사가 원하는 신입사원의 기준에는 맞지 않았지만 이것이 지원자의 능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회사의 지원에서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탈락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냈던 어떤 회사의 소통방식이 뉴스에 소개가 된 적이 있다.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 같은 한국에서 취업시험에 낙방하는 것은 부지기수 일텐데, 떨어진 지원자에게 위축될 필요없다는 격려의 편지는 그 회사의 이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미국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한국처럼 교수식당이라는 것이 없다. 같은 식당에서 학생이든 교수든 함께 식사를 할 뿐 아니라 총장 같은 최고경영자들도 학생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똑같은 식단으로 먹는다. 무디신학대의 나이퀴스트 총장은 보통 일주일에 세번이상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학생들과 얘기한다. 노스파크대학의 에머슨 학장은 행정적인 결정을 하고 통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담당 교수들에게 그 결정을 진행해도 좋을 지 묻고 의견을 구한다.

 

구별된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공동체의 다른 멤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존중할 때 이루어지는 소통은 격이 달라진다. 서로를 존중하게 되고 이 결정이 혹은 이 제안이 나를 존중하고 우리 공동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게 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에서 다루어지는 그 내용을 심도있게 자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Take it or leave it!” 이라는 양분적인 것이 아니라 “Let’s find a good solution together!” 으로 다가오게 된다.

 

토론수업이 이루어지는 하크네스 테이블에서도 마찬가지다. 급우들의 발언을 경청할 줄 아는 학생이 결국 하크네스 테이블을 건강한 토론의 장으로 만들어가고 또 주도해간다. 많은 학생들은 ‘토론수업’이라고 하면 말을 하는 데만 촛점을 맞추지만 사실 토론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잘 듣는 태도’이다. 정치인들의 ‘토론’ 이라는 것을 보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 보다는 자기 말을 하는데 급급하다; 간혹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은 꼬투리를 잡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상적인 토론수업은 오히려 잘 흘러가는 토크쇼에 가깝다. 물론 그 목표가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존중하며 잘 듣고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크네스 교사는 군림하는 보스가 아닌 노련한 토크쇼의 MC처럼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인성적인 자세가 커뮤니케이션에 적용이 될 때, 다루어지는 내용을 넘어서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 일방통행 혹은 수직적인 구조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간다는 존중과 신뢰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