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했다.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 자신없고 서툴러서 주로 혼자 놀았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는데, 내 안에 또 다른 ‘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다른 ‘나’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내 얘기를 들었다. 그들과 상상의 바다를 떠다니며 온갖 모험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안에 또 다른 몇 명의’나’를 가지고 있는 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나’가 지나치게 힘이 세져서 현실의 나를 지배한다면 그때부터 삶의 균형이 깨어지고 고난이 시작된다. 뉴턴이나 다윈에 비교되는 천재이지만 평생 자기 안의 또 다른 ‘나’와의 싸움인 조현병(정신분열병)을 앓으며 노벨상을 수상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 있다.
1940년 후반, 뛰어난 수학도인 ‘존 내쉬’가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한다. 존은 기숙사 독방을 신청했는데 방에는 ‘챨스’라는 룸메이트가 있다. 활달한 챨스는 자부심이 강하고 대인관계에 서툰 존에게 친절하고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존은 동료들이 바에서 금발 미녀를 놓고 벌이는 심리적인 역학 관계에서 힌트를 얻어, 상대방의 행동이나 대응을 미리 예상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내쉬 균형 이론'(Nash Equilibrium)을 발표하고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 성과로 젊은 나이에 MIT교수로 임명된다. MIT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존은 대학원생 ‘알리시아’를 알게 된다. 그녀는 존의 천재성, 고독함, 플라토닉한 사랑에 끌리고 둘은 결혼한다. 존은 프린스턴을 방문해서 챨스와 재회하고 그의 어린 조카 ‘마르시’도 만난다. 그 즈음 국무부 비밀요원인 ‘파쳐’가 접근한다. 파쳐는 존에게 러시아의 암호를 해독하고 잡지와 신문에서 러시아의 암호 패턴을 분석해서 보고하도록 명한다. 존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러시아 요원들의 추격을 당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존이 안절부절못하고 불안정한 행동을 계속하자 알리시아는 남편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알리시아는 존이 파쳐에게 보냈던 ‘극비’라고 쓴 수십통의 보고서 메일이 뜯기지도 않은 채 그대로 우편함에 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파쳐, 코드 해독, 비밀 임무, 이 모든 것은 존의 환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존은 인슐린 충격 요법을 받고 정신병 약을 계속 복용할 것을 약속하고 퇴원한다. 하지만 약이 사고를 방해하고 학자로서의 능력을 둔화시키자 약 복용을 중단한다. 존은 아들을 목욕시키다가 산란해진 정신 상태로 전에 암호를 해독하던 비밀 장소에 간다. 익사할 뻔 한 아들을 구한 알리시아가 떠나려하자 존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한다. 친구 챨스와 마르시가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십수년이 지나도 어린 마르시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존과 알리시아는 약 복용없이 조현병과 싸우기로 결정한다. 존은 오랫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환상속의 파쳐, 찰스, 마르시에게 작별을 고한다. 세월이 흐르고 존은 프린스턴대학 도서관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여전히 조현병이 그를 괴롭히지만 아내와 함께 학자로서의 삶도 병행한다. 1994년, ‘내쉬 균형이론’을 발표한 지 45년이 흐른 뒤에 존은 노벨경제학상을 받는다.
천재 수학자 존 내쉬의 일생을 다룬 영화이다. 20대 초반에 균형 이론을 발표한 내쉬는 아내가 임신한 무렵에 시작된 조현병으로 평생을 시달린다. 영화속 내쉬의 정신병은 기괴하고 흥미롭고 웃기고 슬프다. 실제로 내쉬는 수년동안 캠퍼스를 홀로 배회하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끊임없이 신문 잡지를 뒤척였다고 한다. 곱추의 등처럼 정신에 딱 달라붙어 치유되지 않는 병을 가지고도 삶을 계속하는 내쉬 부부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명석한 젊은 수학자에서 조현병과 함께 서서히 나이를 먹어가는 내쉬의 삶이 아프고 경이롭다. ‘러셀 크로우’의 강렬하고 섬세한 내쉬는 전작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를 압도한다. 사랑과 인내로 헌신하는 알리시아역의 ‘제니퍼 코넬리’도 뛰어나다. 음악과 촬영이 훌륭하고 2002년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