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김의 영화세상]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Blue Jasmin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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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 샤넬 자켓에 고급 액세서리를 걸친 우아한 금발의 ‘재스민’은 처음 보는 옆자리의 승객에게 쉴 새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부유한 사업가 남편 ‘할’ , 뉴욕 최상류층 사교계의 화려한 생활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놓는다. 상대방이 관심이 없는데도 혼자서 계속 떠든다. 재스민은 여동생 ‘진저’가 사는 차이나타운의 서민 아파트에 도착한다. 재스민은 지금 최고로 불행하다. 남의 돈을 불법으로 굴리며 월가의 황제 노릇을 하던 남편은 사기죄로 들어 간 감옥에서 자살하고 전재산은 압류당했다.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에게 ‘루이 비통’ 트렁크 두개에 든 샤넬 옷과 명품 백, 구두가 전재산이다. 아들 둘을 데리고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진저는 착하고 성실하다. 넉넉치 못한 살림이지만 까다롭고 이기적인 언니를 불평없이 받아준다. 재스민은 화려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 한다. 강박증에 우울증, 히스테리가 심해서 늘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고 마티니를 마신다. 몰락한 주제에 일등석을 타고 여동생의 애인인 정비공 ‘칠리’를 낙오자라고 무시한다. 영화는 재스민의 참담한 현재와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과거를 교대로 보여준다. 재스민과 진저는 둘 다 입양된 자매. 예쁘고 야심많은 재스민은 부자 할을 만나 호화롭게 살면서 노동자랑 결혼한 동생을 멀리했다. 진저 부부가 처음으로 뉴욕을 방문했을 때, 할은 진저 남편의 로토 당첨금 20만불을 호텔에 투자하라고 꼬드겨서 날린다. 결국 부부는 이혼을 하고 진저의 전남편은 두고두고 할을 증오한다. 재스민은 사무직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컴퓨터 강습도 받는다. 그러다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외교관 ‘드와이트’를 만난다. 재력과 외모를 갖춘 드와이트는 재스민의 상대로 모자람이 없다. 그는 샤넬 정장에 프라다 선글라스와 에르메스 백을 든 재스민의 고급스런 자태에 반한다. 재스민은 과거를 숨긴 채 부유하고 우아한 미망인 행세를 한다. 드와이트가 청혼을 하고 재스민은 다시 상류사회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지만 진저의 전남편을 만나고 그녀의 실체가 드러난다. 속였다고 화내는 드와이트에게 오히려 성질을 부리는 재스민의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진다.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편의 습관적인 외도를 알게 된 재스민에게 남편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집을 나간다. 배신감과 분노로 어쩔 줄 모르던 재스민은 FBI에 전화를 걸어 남편의 비리를 고발하고 결국 자살하게 만들었다. 드와이트와 헤어진 재스민은 거리의 벤치에 앉아 촛점없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최고 상류층에서 단번에 밑바닥으로 떨어진 속물 여자의 침몰 과정을 서서히 보여주는 감성과 유머, 재치가 빛나는 ‘우디 알렌’ 영화이다. 배우 ‘케이트 블랜챗’이 우아한 허영심과 강렬한 불안, 아슬아슬한 신경쇠약을 수시로 넘나들며 롤러코스터같은 재스민의 감정 변화를 소름끼치게 표현해서 2014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영국아카데미, 배우조합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현실이 비정하고 불행할수록 과거를 붙잡고 매달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언니와 대조되는 블루 칼라 동생의 소박하고 진정한 삶, 가진 자들의 위선과 허영, 무너져내리는 정신을 지탱하지 못하는 명품 브랜드들이 웃기고 서늘하고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