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세상] 그 해 겨울, 동베를린 (The Debt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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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영화 칼럼니스트)

1966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비행기가 착륙하고 세 명의 젊은 남녀가 걸어 나온다.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인 ‘스테판’, ‘데이빗’,’레이첼’. 이들은 주어진 비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국하는 길이다. 레이첼의 얼굴 한 쪽은 거즈로 덮혀 있다.
30년이 지난1997년, 텔아비브. 세 사람의 영웅에 관한 책이 출판되고 성대한 기념식이 열린다. 책의 저자인 레이첼의 딸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조국을 위해 위험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자신의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목숨을 건 증표로 얼굴에 커다란 칼자국이 남아있는 레이첼은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책의 하일라이트를 직접 낭독한다.
1965년. 레이첼이 동베를린에 도착한다. 먼저 와서 대기 중이던 요원 스테판, 데이빗과 함께 ‘비르케나우의 살인마’로 악명높은 닥터 ‘보겔’을 찾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다. 보겔은 2차 대전 당시 수많은 유태인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주도한 인물. 그를 생포해서 이스라엘 법정에서 심판을 받게 하려는 계획이다. 산부인과 의사로 신분을 바꾸고 숨어있는 보겔을 찾은 뒤, 레이첼은 그의 환자가 되어 진찰을 받으러 다닌다.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낡은 아파트에 함께 기거하는 세 명의 요원들 사이에 묘한 긴장과 감정의 교류가 얽힌다. 부부로 위장한 데이빗과 레이첼은 서로에게 마음이 끌린다.
데이빗은 섬세하고 정의롭고 따뜻하다. 팀의 리더인 스테판도 레이첼에게 관심이 있다. 드디어 결전의 날. 레이첼은 마취 주사기를 숨기고 보겔에게 진찰을 받는다.
보겔의 목에 마취 주사기를 꽂고 보겔이 쓰러지자 스테판과 데이빗은 훔친 구급차로 보겔을 납치한다. 이제 서베를린행 기차에 보겔을 싣고 떠나면 된다.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중 깨어난 보겔이 차의 경적을 울리고 무장한 경비원이 나타난다. 레이첼이 경비원의 주의를 돌리는데 그 사이에 기차가 도착한다. 스테판은 데이빗에게 보겔을 기차에 태우고 떠나자고 하지만 데이빗은 레이첼만 놔두고 떠날 수가 없다. 결국 총격과 몸싸움이 벌어지고 요원들은 보겔을 실은 채 도망친다.
아파트에서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보겔을 감시하고 음식을 먹인다. 좁은 공간에서 보겔과 지내는 동안 불안과 절망이 서서히 그들을 잠식한다. 레이첼은 스테판과의 하룻밤으로 임신한 것을 알게된다.
1965년 마지막 날 밤, 보겔은 사기 조각으로 밧줄을 끊고서 혼자 남은 레이첼을 공격한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저항하던 레이첼은 결국 정신을 잃고 보겔은 탈출한다. 스테판은 보겔을 놓친 사실에 경악한다. 민족의 원수를 놓쳤으니 리더로서 엄청난 실책이다. 스테판은 보겔이 레이첼의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꾸미자고 제안한다. 작전중에 사살한 것으로 하면 책임도 면하고 정의도 지켜지는 셈이다. 레이첼과 데이빗은 할 수 없이 동의를 하고 귀국한다. 그들은 30년간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거짓을 토대로 책을 쓴 딸에게 레이첼은 차마 진실을 밝할 수 없다. 출판 기념회가 열린 날, 평생 괴로워하던 데이빗은 트럭에 뛰어들어 삶을 마감한다. 충격으로 자책하는 레이첼에게, 스테판은 보겔이 우크라이나의 어느 병원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정보를 전한다. 노년의 레이첼은 끝내지 못한 30년 전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홀로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모사드요원들의 과거와 현재가 1965년의 동베를린과 1997년의 텔아비브를 축으로 펼쳐진다. 첩보물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의 인간 관계와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다. 진실을 은폐한 댓가는 노년의 주인공들의 무겁고 고뇌에 찬 얼굴에 처절하게 드러난다. 보겔을 아파트로 데려 온 후의 세 사람이 겪는 심리적 갈등은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증오, 혼돈, 두려움, 절망.
그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애쓰는 데이빗과 사악한 본성의 보겔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레이첼을 맡은 두 여배우, ‘제시카 채스테인’과 ‘헬렌 미렌’의 부드럽고도 강인한 연기가 뛰어나고 젊은 데이빗과 스테판, 뱀같은 보겔도 노련하다. 탄탄한 스토리의 재미 만점 스릴러물.